(한국복식문화 공통) 상대시대와 통일신라, 조선시대에 쓰인 남자의 두식과 관모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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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복식문화 공통) 상대시대와 통일신라, 조선시대에 쓰인 남자의 두식과 관모에 대하여 설명하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상대시대의 두식과 관모
1) 두식
(1) 남자 두식
(2) 여자 두식
2) 관모
2. 통일신라시대의 남자의 두식과 관모
1) 두식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2) 관모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3. 조선시대의 남자의 두식과 관모
1) 두식
2) 관모
Ⅲ.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일반적인 머리 형태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궁중과 반가 부녀자들에게 일반화 되었다. 문헌에서 쪽이라는 단어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쪽이라는 말은 원래 북방민족의 언어로 몽골이나 위구르에서는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 뜻은 ‘함께하다, 다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첩지머리
왕비나 내인 등의 궁중 여인들이 평상시에 하거나 외명부에 입궐할 때 당의를 착용하고 사용했던 머리 형태이다. 첩지의 형태는 황비는 봉, 내명 부·외명부는 광금, 은 또는 흑각으로 개구리를 만들어 좌우로 긴 머리에 달고, 가르마 가운데에 중심을 두고 느슨하게 양쪽으로 땋아 뒤에서 머리와 한데 묶어 쪽을 진 머리모양이다.
(5) 땋은 머리
땋은 머리는 관례를 올리지 않은 남·여의 전통적인 머리형으로 변발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미혼여성은 땋은 머리에다 반드시 붉은 댕기를 하였고, 미혼 남성은 검은 댕기를 하였다. 땋은 머리는 조선시대 여성의 옷차림과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개화기에 외국인이 들고 온 카메라에 포착된 장면이 많이 남아 있다. 전통머리의 변천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행했다가 사라진 머리 형태가 많지만, 현대에 남게 된 것은 기혼녀의 머리로 쪽머리, 그리고 미혼녀의 땋은 머리가 있다.
(6) 낭자쌍계
낭자쌍계는 땋은 머리이면서 머리 뒤에 귀 아래로 똑같은 형태의 두 개의 쪽을 만드는 머리 형태이다.「가체신금사목」에는 이 머리모양에 대해 ‘두 가닥을 각각 둥글게 서린 낭자쌍계’라고 설명했다. 머리의 명칭그대로 두 개 쪽처럼 생긴 모양을 말한다.
2) 관모
(1) 면류관(冕旒冠, 冕冠)
고려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즉위식, 결혼식 등에 입는 대례복인 면복에 쓰는 관모로 곤복(袞服)과 함께 착용하였다. 면류관의 기원은 중국 고대의 관모인 작변(爵弁)이 변하여 여러 장식이 더해진 것이다. 한국의 왕은 중국의 친왕례(親王禮)에 따라 구류면(九旒冕)이었고, 왕세자는 팔류면(八旒冕)이었으나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십이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구류면이 되었다.
(2) 원유관(遠遊冠
중국에서 들어온 관으로 고려조선시대 왕의 조복(朝服)에 쓴 관모이며 중국의 친왕례에 준하여 사용했다. 이것은 회색의 나(羅)로 만든 구량(九梁)이며, 고려시대 공민왕 때 명(明)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것은 칠량(七梁)에 서잠도(犀簪導;비녀)를 꼽는 것이었다. 금잠(金簪)을 꽂았고, 황(黃)창(蒼)백(白)주(朱)흑(黑)의 차례로 5가지 색의 옥(玉)으로써 전후 9개씩 18개의 옥을 장식하였고 양 옆에 있는 2줄의 붉은색 주조(朱組;끈)를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3) 통천관(通天冠)
통천관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왕이 조하(朝賀)를 받을 때 입는 강사포와 함께 썼다. 오사모(烏紗帽)의 앞뒤에 각각 12량이 있고 청황홍흑백색의 오색 구슬 12개를 꿰었고 옥으로 된 비녀와 홍색 조영(組纓;끈)을 달았다. 고종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 조선의 왕은 9량의 원유관을 썼지만 광무 원년부터 통천관으로 바뀌었다.
(4) 익선관(翼善冠)
조선시대 왕왕세자의 상복(常服)에 곤룡포(袞龍袍)와 함께 쓰는 관이다. 익선관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복두에서 유래한다. 면류관의 평천판의 옷감과 같은 검은 사(絲)로 덮혀 있고관 뒤에는 양각(兩角)이 위로 향하여 솟아 있다.
(5) 양관(梁冠)과 금관(金冠)
양관은 백관(百官)의 제복(祭服)조복(朝服)의 관모이다. 이것은 앞면 윗쪽에서 꼭대기까지 있는 세로줄을 양(梁)이라고 하여 양관이란 명칭이 붙었다. 양관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양의 수가 달랐다. 제복에 쓰는 양관은 경건한 의미로 검정색이지만, 조복에 쓰는 양관은 당초문양과 목잠(木箴)이라는 비녀가 도금되어 있어 일명 금관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는 말이 생겼다.
(6) 동파관(東坡冠)정자관(程子冠)
동파관은 중국 북송(北宋)의 문인 소식(蘇軾)이 쓴 건이며, 명나라 때에도 널리 사인(士人)계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동파건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중국에서 들어와 동파관이라고 부르며 사대부들이 집안에서 썼다. 동파관은 주로 말총으로 짜지만 간혹 죽사(竹絲)를 곁들여 흑칠을 하였다. 정자관은 중국에서 정자건이라 하는 것으로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정이(程燎)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관은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전후좌우 봉우리의 기복이 심하고 위는 터져 있다. 조선 중종명종 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와 한말까지 사대부와 유생들이 집안에서 착용하였다.
(7) 사모(紗帽)
사모는 복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복두와 형태가 유사하나 대우(帽)가 복두는 모지고, 사모는 곡선으로 둥글렸다. 사모는 백관의 상복(常服)에 쓰는 관으로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 태종 때 상복의 관모가 되어 한말까지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전통혼례식에서 신랑의 사모로 사용된다. 사모의 형태는, 조선 전기에는 대우가 낮고 좌우 무각(無角)이며 흑각(黑脚)을 내려뜨렸고, 중기에는 대우가 높아지고 양각(兩脚)의 폭이 넓어지면서 평직(平直)으로 되었고, 후기에는 대우가 다시 낮아지면서 양각(兩脚)의 폭은 넓으나 길이가 짧아지고 앞으로 굽었다.
(8) 건(巾)
조선시대의 건은 한국 고유의 고깔 모양과 사대부 및 유가(儒家)에서 사용한 중국의 건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9) 입(笠})
우리나라 관모중에서 가장 일반화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와서 입제(笠}制)가 확립되었다.
Ⅲ. 결 론
상대시대와 통일신라, 조선시대에 쓰인 남자의 두식과 관모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나라 머리모양새에 관한 최초의 문헌상 글은 <증보문헌비고>에 쓰인 “단군원년(BC2333)에 머리를 땋고 개수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다. 또한 BC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 중 사람 얼굴 형상을 한 뼈비녀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니 당시의 정확한 머리 모양새를 알 수는 없어도 꽤 오래전부터 머리를 장식하곤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미자, 『우리 옷 이천 년』, 미술문화(2008)
유희경, 『한국 복식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2002)
홍나영, 『말하는 옷 : 한반도 복식 문화사』, 보림(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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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9.16
  • 저작시기2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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