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문학 - 시소설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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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50년대 한국문학 - 시소설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식적 기반은 피해자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하나하나의 위선을 체험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절망감 등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을 끈 것은 부정과 위선과 계산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암흑면을 파헤치고 고발하는 작가정신의 투철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김성한 [바비도]
1956년 《사상계》5월호에 발표되었고, 같은 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김성한의 단편소설이다.
바비도]의 주인공은 재봉직공 바비도이다. 그는 왜 이단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놓이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그는 교회에서 금하고 있는 영어번역으로 된 성서를 읽었던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당시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평신도들은 라틴어로 된 성서를 성직자들이 읽어주는 대로 받아들여야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왜냐하면 성서엔 성직자들에게 불리한 내용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그 대목들을 평신도들이 알아차릴까 성직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많은 신도들은 교회의 위협에 못 이겨 교회의 뜻에 따랐지만 바비도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신념을 굽힐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단으로 몰린 바비도를 성직자들도 죽이고 싶지 않아 바비도 자신이 굽혀오기를 바랐으나 바비도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자기 신념의 포로가 되어 있는 바비도의 모습은 강자의 위협이나 유혹 앞에서 너무 쉽게 자신의 신념을 꺾고 변절하기 쉬운 시대에 강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자기 신념을 위해 죽는 사람은 당장은 괴로워도 먼 훗날 세상에 소금을 뿌리게 된다는 것을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1410년 이단으로 지목되어 화형을 받은 재봉직공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이 작품은 조직화된 교권제도의 틀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개성을 박탈당한 주인공 바비도가 이러한 메커니즘화된 조직에 어떻게 반항하다 이단죄로 화형을 받고 죽어갔는가 하는, 한 인간의 반항적이고 영웅적인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극은 곧 현대의 상황, 현대인의 비극과도 상통하고 있다. 비록 역사적 제재와 인물 속에 설정되었지만, 그것은 현대사회에 대한 비탄과 메커니즘에의 반항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드러난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양심에 대한 갈등과 저항과 죽음의 궤적은, 50년대 한국사회에 노출된 심각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손상된 민족적 정기의 회복과 6 25로 입게 된 피해의식의 치유라는 시대적 소명이 과거 역사의 현재적 관점에서의 재구성에 의해 거족적으로 환기되는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부패한 자유당정권을 풍자한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현실이 강요하는 권위와 독선에 대항해 보다 적극적이면서도 인간의 숭고한 존엄에의 수호를 외치는 실천적 반항적 인간형을 창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이 작품은 재래 한국소설의 순수적 토속공간을 파괴하고 현대적 지성 우에 체질적 현대화를 단행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비도를 통해서 제시된 사회적 정의와 개인적 양심의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인간형의 제시 차원을 뛰어 넘는 현대인의 비극과도 상통한다.
⑤ 황순원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이고 부친은 황찬영(黃贊永), 모친은 장찬붕(張贊朋)[1]으로 그의 부친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1921년 만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1929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게 된다. [2]
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31년 7월 《동광(東光)》에 실은 〈나의 꿈〉이 등단작이다. 이후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고, 이 단체 이름으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放歌》를 간행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 해 5월에 두 번째 시집 《骨董品》을 냈다. 이후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고 문학 편력이 소설로 넘어간다. 그 첫 작품은 1937년 7월 《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副詞〉이다. 이듬해 10월에 〈돼지系〉를 발표하고, 이 두 작품을 비롯해서 창작 연대가 확실치 않은 다른 11편의 단편을 함께 묶어 그로부터 3년 뒤인 1940년에 《황순원 단편집》(나중에 이 책을 『늪』이라는 제목으로 고쳐 펴낸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단편소설을 주로 쓰며 활동하다가 1942년 이후에는 일본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고향인 빙장리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채 여러 단편을 썼다. 8.15 광복 이후 황순원은 평양으로 돌아가지만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지주 계급으로 몰리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이듬해 월남했다.
월남하여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한 황순원은 지속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53년에는 장편 작가로서 그를 인정받게 한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를 발표한다. 1957년에는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전임하여 생활이 안정되면서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5년 발표한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발표할 때까지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0년 타계할 때까지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으나 간간이 시작품을 발표하며 말년을 보냈다. 아들 황동규는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 《소나기》는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부각시킨 내용의 뮤지컬로도 제작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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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30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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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94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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