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지역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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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월지역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영월개관
Ⅱ. 단종애사의 지역
Ⅲ. 단종의 무덤 장릉과 조선왕릉의 구조
Ⅳ. 영월의 불교유적
Ⅴ. 동해지역

본문내용

리탑이 있다. 적멸보궁 뒤 축대 위에 석조 사리탑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전해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의 외부는 뒷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을 엎었는데 남향한 입구 쪽 정면만 높고 뒷편은 경사 때문에 약간 봉긋한 모양의 원형으로 마치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석함의 부재>
토굴 안의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가 중심부에서 서쪽 한쪽만을 확장하고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내부의 높이는 키 작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인 160센티미터 너비는 190센티미터에 불과해 앞쪽에 조그마한 숨구멍만 남겨둔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자장 이후 다른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석관을 안치하여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고 경첩을 간직하던 곳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 옆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모셔올 때 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몸체의 개석이 모두 파손되어 있으나 각부의 부서진 조각이 잔존함으로서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석함은 한 개의 장방형 돌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징효대사가 쓰던 경함이라는 설도 있다.
본래의 위치가 아님이 분명하며 뚜껑돌은 남아있으나 다른 부재들은 파괴되어 그 원형을 찾을 수가 없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이 석관은 바로 옆에 있는 석실 속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언제 이렇게 밖으로 나와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 승탑
토굴 옆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위치하고 있는 사리탑은 석조부도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신은 상· 하단이 약간 좁아진 배흘림이 있는 八角柱形(팔각주형)으로 전· 후 양면에는 門扉(문비)를 모각하고 그 안에 자물통을 양각하였는데, 전 · 후면의 형태는 조금씩 다른 점이 있다. 이 같은 전후 양면을 제외한 나머지 6면에는 모두 각종 입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전면 문비 좌우 양면에는 仁王像(인왕상)을, 그 밖에 좌우 양면에는 四天王像(사천왕상)이 있다.
이 부도의 조성 시기는 앙· 복련과 안상 등의 조성 양식이 고려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탑신부의 배흘림이나 각 면에 조각된 입상의 조성양식으로 보아 그 보다 다소 뒤진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는 전체 높이 2.4m, 지대석의 한 변의 넓이 1.5m다.
라. 징효대사 보인탑비 : 보물 제612호.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녕사지에 있는 고려 초기의 탑비. 944년(혜종 1) 건립. 비신높이 2.77m, 너비 1.14m.
비의 형식은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首)로 덮은, 신라·고려 때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비신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완전한 형태로 남아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자경은 2.5㎝로 최언위(崔彦)가 지은 내용을 최윤(崔潤)이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각자는 최환규(崔奐規)가 하였다. 신라의 국사인 징효의 휘는 절중(折中)이고 자와 속성은 마멸로 알 수 없으며, 휴암() 사람이다.
비문에는 이밖에도 대사의 가계, 826년(흥덕왕 1)에 진전법사(珍傳法師)를 사사하고 19세에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아 탁월한 총명으로 수행하고 교화한 것, 75세(901년)에 입좌하여 입멸하였고, 그밖에 효공왕이 징효대사와 보인(寶印)이라는 탑명을 증시한 것 등을 적고, 말미에 대사의 공덕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이 비는 신라 효공왕 4년에 입적한 징효대사를 기리는 명문인데, 이미 지었던 것을 국가가 바뀌는 어지러움 때문에 그뒤에 새겨서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신라와 고려초에 유행한 초당의 필법으로 구양순풍(歐陽詢風)으로 볼 수 있다.
마. 징효대사 승탑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징효대사보인탑비의 서북쪽 약 30m 지점인 언덕 밑에 위치하고 있는 징효대사 부도는 강원도 지정유형문화재 제72호다. 하대석의 구성과 안상 및 복연, 귀꽃 등 각 부분의 조식 수법이 羅末麗初(라말려초)에 많이 유행된 석조부도와 흡사하다. 중첩된 앙연, 탑신부의 문비모각양식, 옥개석의 추녀와 귀꽃의 장식수법도 고려초엽까지 통용된 수법이다. 높이 267cm, 지대석의 한 변의 넓이가 135cm다.
<요선정과 마애여래좌상>
4-2. 무릉리 마애여래좌상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3.5m.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지(寺址) 위에 20세기 초 요선정(邀仙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는데, 이 마애불좌상은 그 정자 옆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다. 조각은 고부조(高浮彫)로 되어 있다. 소발(素髮 : 민머리)의 머리에 육계(肉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크다. 귀 또한 크고 길어 어깨에 이른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양감(量感)이 있고 눈, 코, 입이 큼직큼직하다.
둥근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불의(佛衣)가 걸쳐져 있으며, 두께가 두꺼워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배 위에는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선명하게 보인다. 상체에 비해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가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을 뿐더러 상체의 길이도 너무 길어 신체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
하체는 주로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으로 새기고 있다. 양 무릎과 발의 표현에 있어서 도식화가 역력하다. 손의 모양도 독특한데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손등을 보이고 있다. 왼손 역시 오른손과 평행으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각각 새기고 있다. 두광은 연꽃무늬로, 신광은 2줄의 선으로 구분 짓고 있다. 대좌는 연판 안에 꽃무늬가 있는 앙련(仰蓮 )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애불좌상은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주름과 신체 각부의 표현에 도식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이 지방 장인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현재 강원도에는 마애상의 유례가 드문 실정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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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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