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洪景來] 혁명과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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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1).이 시기의 사회적 배경
2)혁명의 준비와 전개 실패요인
3)홍경래의 난이 아닌 혁명인 이유

본문내용

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조직적이고 계획된 행동이였다고 할 수 있다.
3. 봉기의 주도계층
정주성에서의 최후 항전 당시 봉기초기의 저항적 지식층, 상인층과는 달리 하층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만큼 농민들도 현실의 모순과 개혁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농민봉기는 단순히 정권획득을 목적으로한 지배층 내에서의 정변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개혁 요구였으며 홍경래를 비롯한 주도계층의 일관된 난이 아니라 관의 조세수탈, 농촌지역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속에서 피지배계층에서 자연스럽게 싹터온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홍경래는 이런 피지배계층의 대변인 역할을 한 것이다.
4. 봉기 후의 그 영향
홍경래의 봉기는 하층·농민들에게 현실 세계의 모순과 이를 위한 스스로의 극복의지를 일깨워주고, 지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하층·농민들에게 왕의 권력도 부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하층·농민층의 각성 정도는 1862년 전국적 농민항쟁 단계를 거치면서 부민(富民)층의 지도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투쟁을 전개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1894년 농민 전재에서는 봉건 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변혁의 운동의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봉건 지배 체제를 허물어 가는 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홍경래의 농민봉기와 갑오농민혁명
1. 통일된 사상적 체제
갑오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을 필두로 일어난 농민혁명이다. 그들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말의 부정부패에 일소를 가하고자 하였고 농민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즉, 갑오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으로서 사상적으로 규합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또 그것으로 하나로 응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젠 홍경래의 경우를 보자. 홍경래가 봉기에 앞서 띄운 격문을 보면 나라가 어지러워 제세에서 정진인(鄭眞人)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오셔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유행하였던 정감록(미륵사상)의 사상이다. 그 내용은 겉으로 보기엔 대단히 미신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당시 민심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홍경래가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에 불과할지라도, 새로운 이상향을 바라는 민심의 거울로서 홍경래는 이를 직시하고, 이것으로 농민들에게 봉기의 의지를 복돋아 주고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홍경래가 내세운 목적은 도탄에 빠진 민심을 구한다는 것이다.
2. 현실의 모순 극복과 신분제의 부정
지역차별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신분차별과도 연관된다 지역차별의 타파는 신분제의 타파와도 연결되지 않을까. 이것은 다름아닌 신분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던 갑오농민혁명과 연결이 된다. 다시말해 관서지방의 차별대우를 말한 것은 그의 고향의 민심을 얻어내고 신분제의 폐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지역차별을 내세워 결국엔 신분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홍경래는 봉기할 때 다른 반란자와 같이 '왕'이라 칭하지 않고 단지 '평서대원수(관서지방의 우두머리 정도)'라 하였다. '왕'을 칭하는 것은 바로 왕조의 교체를 바라는 즉, 새로운 신분사회를 말하는 것이라 할 때, 홍경래가 단지 '평서대원수'라 칭하는 것은 분명 새로운 신분사회의 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그의 봉기가 적어도 혁명적·농민적 성격을 지녔다고 본다.
또한, 갑오농민혁명의 토지의 균등지급을 토지개혁이라 한다면 홍경래의 주장도 결국 토지개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갑오농민혁명이 신분제 폐지, 토지개혁으로 평등 사회를 구현한다면, 홍경래의 봉기도 그에 못지않은 혁명적인 것이다.
3. 자치적인 해방구 설치
갑오농민혁명시 농민군은 1차 농민전쟁 후 청·일 세력이 들어오자 전라도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만든다. 집강소는 농민이 행정력을 장악하여 그 지역을 관할하는 이른바 지방자치정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가 지방 행정 세력을 포섭하여 그 휘하에 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자치권(행정권)까지도 함께 장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지방출신이 행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집강소의 '자치'의 의미와 어느 정도 부합될수 있을 것이다.
4. 농민층의 의식변화와 폭넓은 참여
갑오농민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농민층의 큰 호응을 얻고 그들의 많은 참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홍경래 농민 봉기 역시 봉기 후에 무려 4개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농민층이 이 봉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중에 지배층이 분열되어 배신자가 속출하였어도 농민층은 죽을 때까지 정주성에서 관군과 맞섰다. 이것은 그의 봉기가 농민층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말한다. 실패 이후에도 홍경래는 민중의 뇌리에 계속남아 19세기 조선 민란의 효시가 되며 후의 갑오농민혁명까지 이어진다. 이것만으로도 크나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즉, 홍경래의 봉기는 당시 조선 사회의 말세를 목격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농민의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며, 막 깨어나려는 근대적 시민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홍경래의 봉기가 감히 혁명이라 말 할 수 있는 점이다.
Ⅲ. 結論
홍경래의 저항은 결국 세도권력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장기간에 걸쳐 준비한 봉기였지만 새로운 정치권력을 형성할만한 기반을 갖춘건아니었다. 지역적 한계와 전술적 오류 지도부 내부의 갈등도 있었다. 어찌보면 혁명으로 보는 것이 약간은 무리인 점도있다. 그렇지만 홍경래의 항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어떠한 저항보다도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되었으며 장기간의 항쟁을 이끌어낸 중요한 사건이다. 홍경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영웅으로 각인 되었고 이어지는 수많은 역사에서 그는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그가 잊혀질 무렵 농민들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항쟁을 전개해 나갔다. 깨어있는 조선의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기위한 대변혁을 꿈꾼 것이다. 그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 홍경래의 혁명은 이러한 민중들의 첫 번째 소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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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16
  • 저작시기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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