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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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의 아리우스주의자인 상이본질파(Anoimoeans:相異本質), 둘째 다수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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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적인 유사본질파(homoiousian:類似[homoiousios]本質), 세째 이것도 저것
도 아닌 정치적인 아리우스자인 동류본질파(ho-moeans) 이었다.
이들 중 극단적 아리우스 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다른 몇몇 곳에서
그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중립적인 다수의 보수주의자안 유사본질파와 동류
본질파들은 358년 앙카라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니케아파보다도 극단적 아리우스를 더 적대시 하게 되어 마침내 보수파들은
아다나시우스파와 연합하였다.
황실 정책의 유동성 때문이라는 것은 콘스탄틴 자신이 제국의 결속을 다
지는데 목적을 둔 만큼 한때는 니케아파를 지지하다가 돌변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콘스탄틴2세는 콘스
탄틴을 이어 니케아파를 지지하고, 그가 죽자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동방
정부의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주의를(반니케아파) 지지했고 서방정부의
콘스탄스는 니케아파 즉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하므로 두 형제 황제 사이는
우호적이지 못했는데 350년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스를 살해하므로 명실공
히 콘스탄티누스가 전 제국의 황제가 되므로 잠시 아리우스주의가 정치적으
오 진전됨에 따라 아다나시우스는 이런 와중에서 5차례에 걸쳐 추방살이를
하였다.
361년 콘스타티우는 사망하고 그를 계승한 황제들은 교회정치에 거의 관
여하지 않았고 373년 아다나시우스가 사망하자 이를 계승한 신(新) 니케아
파가 나타났는데 이들이 카파도키안인 가아샤라의 바질, 나찌안주스의 그레
고리, 니사의 그레고리였다. 378년경에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아리우
스주의의 반박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간 뒤 379년 니케아 신앙의 추종자
데오도시우스가 즉위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동방교회 회의를(제2차 전
체공의회) 소집하여 신조를 최종 확정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고 다만 니케아신조에 덧붙인 저주의 말을 제거했다.
그래서 이 신조는 니케아신조를 대신해서 오늘날까지 그냥 "니케아신조"라
고 불리워진다.
자료원 : 한국컴퓨터선교회 모음
발행일 : 910509
분 류 :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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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6/20 입력일 : 92/09/15 20:35:48 자료량 :36줄
제 목 : 삼위일체론 ( 3 니케아 회의 이후의 삼위일체론 / A 아다나시우스 )
A.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
아다나시우스가 삼위엘체론 형성에 있어서 크게 공헌한 것은 니케아신조
에도 잘 명시되지 않은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성령이 완전히 신적이며 성부
와 성자와 더불어 공동실체적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니케아신조에서 자세히 논의되지 않았던 삼위일체론적 도식을 완성하였다.
아리우스는 성령을 하나의 위체로 간주하였으나 성자의 본질이 성부의 본
질과 전혀 같지 않은 것과 꼭 같이 성령의 본질도 상자의 본질과 전혀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는 논증을 위해 '성자'와 '신앙의
표준'에서 권위를 찾았는데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일치된 점은 성령이 피조물과 공통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성삼위 안에 있는 신성에 속하며 그 신성과 하나이다'라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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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증명하고 그는 성삼위가 영원하고 동질적이며 분할 할 수 없다는 것과
성령이 성삼위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공동실체적
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다나시우스는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식문'
을 통해서 성령이 피조물일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신학이 갖는 큰 약점은 삼위일체의 다양성과 통
일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확정된 용어가 결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삼위의 숫자적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말
을 많이 쓰지 않고 '성부의 본질에 귀속된( s s s s)'
이라든가 '실체에 있어서 마찬가지( s )'라는 등의 표현으로
만족한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존립체를 품격으로 표현할 자기 자신의 용
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와 s의 차이를 별로 혹은 전
혀 식별하지 못했던 같다. 그의 기본 입장은 무한하고 단순하고 나뉠 수
없는 신적인 가 동시에 성부와 성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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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5/20 입력일 : 92/09/15 20:35:48 자료량 :46줄
제 목 : 삼위일체론 ( 3 니케아 회의 이후의 삼위일체론 / B 카파도키아 교부들 )
B.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감독이며 동시에 신학자였던 세 사람이 4세기 후반부의 신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들을 가라켜서 세 사람의 위대한 카파
도카아 교부들이가고 부른다. 즉 카파도카아 지방의 가이샤라의 대 바질
(Basil, the Great), 그의 동생이며 니사에서 감독으로 있는 그레고리
(Gregory), 그리고 이 두 형제와 다같이 친분을 나누었던 나찌안주스의 그
레고리이다.
세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나찌난주스의 그레고리였는데 그는 교부
들 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삼위일체교리를 위해 결정적인 도식을 만들어
냈다. 이를 위해 아다나시우가 못했던 여러가지 개념을 구별 지었다. 그들
은 두 계열의 개념을 사용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신성>, <하나의 본
질 또는 존재 >,<하나의 본성>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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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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