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언 이 용도 목사의 예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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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들어가면서

II. 이 용도에 나타난 동양적인 것

III. 이 용도의 예수론

IV. 나가면서.

본문내용

젊은이들을 위한 선교를 열어놓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큼 진실하게 예수의 삶을 사는 지도 생각해 볼일이다.
이제 글을 마침에 있어 이 용도의 목회와 삶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그의 예수를 향한 생명과 사랑의 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예수와의 일화를 추구하고 영성을 철저하게 내면화함으로서 가족과의 관계, 제도로서의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관계, 교회의 역사성과 사회 윤리성에 대해서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현대 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는 액면 그대로 용도의 삶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물론 그의 메시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표현된 정의, 공의, 의, 진리에 의해서 교회의 개혁적인 메시지를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담겨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과 사유가 천적애로 포월되는 과정은 오히려 신앙의 개인화, 내면화로 치달았다고 보겠다. 이점에서 기독교가 갖는 사회의 책임이 간과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사랑의 영성화를 통해 볼 때 기독교의 메시지는 철저한 개인주의와 철저한 보편주의의 사유에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제도나 사회가 갖는 합리성에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같은 제안이 용도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신앙의 사회적인 표현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영성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사회 참여를 통해 사회를 개혁시키기에 앞서 용도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개혁,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독교인 개개인의 변혁이 먼저 있어야 했었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 요구된 것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별을 하고, 이 둘 중에 영적인 삶의 추구를 지향함으로서 육적인 고난을 오히려 미화하는둣한 인상을 주게된다. 정말 영적인 삶을 위해서 육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이 용도의 상황에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바꿀 수 없는 상황으로 부딪혀지는 가난과 병고와 고난을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는 것을 용도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신앙의 위대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교회의 입장에서 가난과 고난은 이상화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같이 나눠먹고 베푸는 사회구조를 개선함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무지와 게으름을 타파함으로서 보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신앙을 감정과 낭만에서만 할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의 성화신학 혹은 천적애의 사랑이 사회와 구조를 개선하고 변혁하는데 까지 끌고가야 하는 것이 남아있는 후대인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용도의 동양적인 영성, 한국인의 영성에서 그의 자연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 속에서 무화와 자기 비움의 지혜를 배웠다. 자연 안에 내재된 하느님을 보았거니와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만났던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우리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찾아야 할 친구이며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대리인인 인간으로서 자연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책임을 갖게 된다. 용도의 자연사랑은 오늘 신학하고 목회하는 후대인들에게 생태계의 위기에서 새로운 생태신학의 가능성을 미리 실천하였던 선구자로 볼 수 있겠다. 자연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라면, 기도할 수 있는 성소라면, 그리고 그 성소를 통해 예수의 생명을 만나고 예수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라면, 자연의 파괴가 곧 하느님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예수님을 몰아내는 것이란 메시지를 듣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영성이 메말라 가는 것은 자연을 이기적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용도가 사용했던 영육 이원론은 실체로서 몸과 마음이 나누어져 있어 육은 열등한 것이고 영은 우등한 것으로 이 둘의 관계를 선-악 이원론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용도가 사용했던 영-육 이원론에 입각한 금욕주의의 사유는 관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하고 싶다. 보이는 것은 무조건 열등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우등한 것으로 보는 것은 역사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등 수 없이 세상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죄를 범하여왔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났던 용도의 삶은 이미 그 삶 속에서 범재신론(Panentheisms)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저술집, 231쪽. "하나님의 말씀을 만물 속에 잠재합니다. 진리의 연석에 들어가면 만사에 개안합니다. 신을 찾음은 우주를 전유하는 일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예수가 그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육적인 것도 하느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한 것이고 경시될 것이 아니다. 영과 육은 관계개념이지 서로 독립된 실체개념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영과 육은 명사로서 사용될 것이 아니고 한 실재의 두 면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사용되어야 한다. 즉 영적인 삶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고 육적인 삶은 인위적인 욕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용도는 죄를 인위적인 것이라 표현하였고,
. 변 종호 편저, 이 용도 목사 일기, 126쪽. "저희의 죄 -- 성신의 뜻보다 인위만을 쫓는 저희의 죄 -- 를 알았다."
마귀를 인간 욕심의 의인화라 하였다. 신앙인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육적인 이기심에 기초할 수 있고, 영적인 사랑에 기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영의 육화, 영의 삶화, 예수의 생명의 삶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러한 영적인 삶을 위해 용도는 영-육 이원론적인 금욕주의의 삶을 살았다는데 있다.
이런 모든 평가와 제안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민족의 현실과 척박한 교회의 현실에서 외롭게 외쳤던 광야의 소리, 회개의 소리, 사랑의 소리에 먼저 깊이 겸비한 자세로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태도인줄 믿으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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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3.02.08
  • 저작시기2003.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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