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상과 농민전쟁☆ 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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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1. 동학사상과 농민전쟁

(1) 동학사상과 그 조직

(2) 교조신원에서 `斥倭洋`으로

2.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고부민란

1) 고부민란의 배경

2) `사발통문` 거사 계획

(2)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3)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4) 농민군의 재봉기와 동학 상층부의 대응

(5) 공주 공방전과 농민군의 패배

본문내용

것을 수행하겠다고 하며 철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내정개혁' 요구는 조선에 대한 침략과 청국과의 전쟁을 위한 구실이었다. 즉, 일본군의 출병이 농민군으로부터 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구실이고,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일본정부는 선전포고를 하고 아산만 부근에서 청국군을 공격하였고, 또 충청도 성환에서 섭사성이 이끄는 청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청국군은 평양회전에서 또 다시 패배하였다.
전봉준 등은 전주화약 이래 청일 양군의 철병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조선이 양 외국군의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일방적 점령의 위기가 점점 깊어졌다. 그리하여 전봉준 등은 귀향한 농민군을 재결집시킴과 동시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동학조직과 연합하기 위해여 제2대 교조 최시형 등 동학 상층부의 설득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동학 상층부는 '지상천국'의 실현은 '무위이화'한다고 하여 동학의 포교에 의한 인간 교화를 유일한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포교의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최우선하고 어떠한 실력 행사에도 반대하든가 소극적이었다. 또한 최시형은 동학의 조직과 농민을 망라하여 일대 농민전쟁으로 발전했을 때 그의 직접 관할하에 있던 북접(충청도)의 동학조직이 그에 호응하는 것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접(전라도)의 동학도에 적대적인 태도까지 취하였다. 즉, "亂으로써 도를 호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국가의 역적이고 師門의 亂적이다"라는 통문을 올리고 북접의 각 포에는 전봉준 등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11월 일본군과 정부군에 대한 공주전투를 앞두고 최시형 등을 설득하는 데 힘쓰고, 북접과 남접이 협력하게끔 노력하였다. 또 북접 각 포의 하부에서도 전라도의 농민전쟁에 대한 통일행동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져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전봉준에게 협력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공주전투에서는 충청도의 북접군이 전라도의 남접군에 합류하였다.
(5) 공주 공방전과 농민군의 패배
공주를 둘러싼 공방전은 11월 19일 농민군이 공주의 전초기지인 이인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대교, 웅치. 효포에서 격전이 전개되었는데, 지리의 이로움을 이용한 정부군과 일본군의 근대병기에 의한 집중사격과 포위작전으로 이하여 농민군은 경첨청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농민군은 정부군과 일본군을 우금치로 몰아넣고 7일동안 쟁탈전을 반복하였다. 우금치를 둘러싼 격력한 공방전 속에서 농민군 지휘소는 정부군 및 민중에 대하여, 조선인끼리의 골육상쟁을 중지하고 '척왜척양의 義'에 합류하라고 호소하였다. 이는 '고시 경군 여 영병 이교 시민(告示京軍與營兵吏校市民)'에서 알 수 있다. 1894년 9월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여 일본군의 방어진지이자 충청도 감영이 있는 공주(公州)를 점령하기 위하여 우금고개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대혈전을 치렀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공격군의 위차가 극히 불리한 데다가 일본군의 근대적 화력에 밀려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농민군이 충남 강경으로 출발하기 이틀 전인 1894년 11월 12일 전봉준이 서울에서 파견된 중앙군과 충청감영 병사, 공주읍내 아전과 상인들에게 골육상전을 하지 말고 반일(反日)의 대의(大義)하에 대동단결할 것을 호소한 글이 그것이다.
-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 -
다름아니라 일본과 조선이 개국 이래로 비록 이웃나라이나 누대(累代)로 적국이더니 성상(聖上)의 인후(仁厚)하심을 힘입어 삼항(三港)의 개항을 허락하여 통상한 이후 갑신 시월에 사흉(四凶)이 적을 끼고 활동하여 군부(君父)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더니 종사의 흥복으로 간당을 소멸하였다. 금년뉵월에 개화간당(開化奸黨)이 왜국을 체결하여 밤을 타서 왕성에 들어가 군부를 핍박하고 국권을 함부로 자단(恣斷)하며 더구나 방백 수령이 모두 개화파 소속으로 인민을 어루만지고 구휼하지 아니하고 살육을 좋아하며 생령을 도탄에 빠지게 하매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청평(淸平)하고 사직을 안보할 새 매양 의병이 이르는 곳마다 병정과 군교(軍校)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서 접전하매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피차에 상하니 어찌 불쌍하지 아니하리요. 그 실은 조선사람끼리 서로 싸우자 하는 바 아니어늘 이와 같이 골육상전(骨肉相戰)하니 어찌 애닮지 아니하리요. 또한 공주와 한밭〔大田〕의 일로 논하더라도 비록 봄 동안의 원한을 갚은 것이라 해도 그 일이 참혹하여 후회막급이며 방근 대군이 서울을 점령하여 팔방이 흉흉한데 서로 싸우면 이는 골육상전이라. 일변 생각건대 조선사람끼리라도 도(道)는 다르나 척왜(斥倭)와 척화(斥化)는 그 의(義)가 일반이라.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자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아니하게 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할지라.
갑오 11월 12일 동도창의소(東道倡義所)
제2차 농민전쟁은 전라도 태인의 삼산(성황산, 간가산, 도리산)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전봉준은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순창으로 남하하여 재거를 꾀했지만 12월 28일 순창군내의 피로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서울의 일본 공사관 내에 수감되었고, 1895년 4월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고, 19세기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전쟁과 함께 가장 본격적인 농민전쟁이었으며, 1894년 7월부터 시작되는 갑오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각지로 분산된 농민군은 각지에서 유동하면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반일의병투쟁으로 이어지는 단서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 자료모음-한국탐사
· 『자료-한국근현대사입문』, 이종범 최원규편, 혜안, 1998
·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사상」,『한국근대사』 , 강재언, 한울, 1990
· 『한국사 39』, 국사편찬위원회, 1999
· 「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와 농민군의 지향」,『1894년 농민전쟁연구 5』, 박찬승,
역사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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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8
  • 저작시기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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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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