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교육사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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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에라스므스의 사상
피히테의 사상
이황의 사상
이이의 사상
이승훈의 사상
안창호의 사상
남궁억의 사상

본문내용

었다.
이상 한서의 교육 활동은 흥화학교, 배화여학교, 상동 청년학원의 교사로서 현산학교와 모곡학교의 설립자로서, 교육월보'의 창간자로서, 민립 대학운동의 참여자로서 요약될 수 있다.
한서는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많은 시가와 여러 편의 저술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가정교육 교과서가 있다. 그 내용은 시부모 섬기는 법, 남편 섬기는 법, 아이 기르는 법, 아랫사람 부리는 법, 가법을 세움, 친구 사귀는 법, 음식품의 이해(利害)를 분간하는 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일부는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내훈서(內訓書)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대체로 오늘날 가정학 교과서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조선어법'이라는 우리말 교과서와 동사략'(東史略)', 조선 이야기' 등의 국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조선어법'은 궁체(宮體)글씨로 국배판(菊倍版) 갱지에 정성스레 초잡은 것인데 1947년 정음사에서 발행한 향토' 제 4호에 조선 문법'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일이 있고 외솔회에서 발행한 나라사랑' 제 11호에도 수록되어 있다.
동사략'은 한서가 배화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비밀히 저술하여 영문법시간에 학생들에게 몰래 가르치던 것인데 제 1권은 단군 조선으로부터 신라말까지, 제 2권은 고려초부터 공양왕까지, 제 3권은 조선초부터 철종까지, 제 4권은 철종 때부터 융희황제까지이며 부기(附記)로 3.1운동의 참상을 기록하였다.
한서는 교육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목적으로서 첫째, 애국애족하는 사회인, 둘째, 진실.성실한 도덕인, 셋째, 생산 실천하는 산업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한서는 이와 같은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교육내용과 방법을 실천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흥화학교, 배화여학교, 상동 청년학원, 현산학교, 모곡학교, 교육월보'창간, 민립대학운동 등의 교육활동과 저술을 통해 대강 살필 수 있다. 한서가 행한 교육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역사 교육,예능교육, 실업교육이 그것이다.
예능 교육은 한서 자신이 아악(雅樂)과 현대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많은 노래를 작곡 작사하여 학생과 주민들과 같이 불렀다. 당시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구미 문화를 수용하면서 학교교육 과정이 크게 달라졌는데 특히 예능 교과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일찍이 새로운 문물에 접한 한서는 그 당시 무감각한 주민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노래 부르기를 권장하였다. 그가 지은 조선 지리가', 권학가', 무궁화 동산', 기러기 노래', 일하러 가세', 조선의 노래', 시절을 잃은 나비' 등의 노래는 우리 겨레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으며, 강원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리워졌다.
한서는 이와 같이 노래를 통해 심성을 계발하고 나아가 성격을 형성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있어서 노래를 중요시하였다. 또한 한글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신편언문체법'이라는 책으로 발간 학생들에게 한글 붓글씨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학생들의 정서 순화를 위하여 학교와 교회에서 성탄일과 꽃주일 행사를 성대히 열고, 학교에서는 학예회를 자주 열어 음악, 연극, 시가 등을 통하여, 그리고 붓글씨를 쓰게 하면서 직접적이고 경험적이며 심미적인 예능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다.
실업 교육에 있어서 한서는 전통적인 한문 글공부를 통해 과거 준비나 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을 개선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육의 과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실업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모곡학교에서는 실업을 중요한 교과내용으로 하여 학생들과 함께 풀베기, 나무하기, 나무 심기, 묘목 기르기 등을 중요한 일과(日課)로 할 뿐만 아니라,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가마니틀, 자리틀을 마련해 놓고 가마니나 자리를 짜고 새끼 꼬기, 짚신 삼기를 마을사람들과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를 계속하였다.
한서가 그의 교육 목적과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행동인을 만들기 위하여 주지주의적 이론 위주의 교육을 배격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둘째, 주체성있고 조국과 동포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국사와 국어 교육을 강조하였다.
셋째, 생산과 노동을 중요시하고 책임감이 강한 생활인을 만들기 위해 실과(實科)와 실험실습을 중요시하였다.
넷째, 피교육자에게 강요와 억압을 하는 전제적인 교사상을 배격하고 이해와 설득 그리고 솔선수범으로 모범이 되어 교육력을 강화하는 민주적 교사상을 중요시하였다.
다섯째, 학교교육 이외에 사회와 언론과 종교를 통한 교육도 중요시하였다.
결국 한서의 교육사상은 교육구국의 사상으로 귀결되며, 교육목적, 내용, 방법등 그의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서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계몽된 민중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교육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고 하겠다.
3.교육사적 의의
한서는 내적 모순과 외세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울어 가는 한말의 전환기에 태어나 평생을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의 수난기를 감래하였으며, 끝내 그가 염원, 확신하였던 민족의 자주독립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의 일군이 가셨으니 우리들 조선사람은 슬퍼한다 고하였으며, 이은상은 역사의 풍우 속에서 구국의 의기와 정열에 불타오르던 민족혼의 등대요, 남먼저 깨어 일어나 외치며 앞섰던 새 세대의 신봉 이라고 하였다.
한서 남궁억은 개화의 선각자,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민족의 장래를 위해 횃불을 든 민족혼의 등대로서 민족이 수난과 핍박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조선의 일군이었다.
물론 그의 교육적 민족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으며,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이 장래를 위한 준비로써 실력 양성으로만 그쳤을 뿐 식민통치에 대한 절대 투쟁으로 나가지 못한 점이 있고, 그의 민족운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적 감정을 민족의식으로 활성화하는데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까지 발전하지 못한 점이 한서의 교육적 민족주의와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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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4페이지
  • 등록일2003.03.31
  • 저작시기2003.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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