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궁중가례복식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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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Ⅱ. 조선시대 가례의식
1. 역사적 배경
2. 가례의식절차
3. 고종명성후가례

Ⅲ. 고종명성후가례복식 고증 및 복원
1. 고종의 복식
2. 명성왕후의 복식
3. 대원군의 복식
4. 부대부인의 복식
5. 가례도감의궤 반차도에 나타난 복식

Ⅳ. 고종명성후가례복식 제작
1. 면복
2. 적의
3. 조복
4. 원삼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았다. 赤古里(唐赤古里)는 草綠鄕織으로 제작하였으며 안감으로는 大紅水紬로 하였다. 單赤古里는 紫的鄕織으로 하였고 衫兒는 백초로 하였다. 大 赤 는 大紅鄕織으로 하였고 안감도 大紅色 비단으로 하였으며 금박은 2단에 걸쳐 장식하였다. 膝 赤 는 藍色鄕織으로 하였으며 안감도 역시 藍色으로 하였으며 끝에 금박을 둘렀다. 대슘과 단속곳, 다리속곳은 모두 흰색이다.
(前面) (後面)
<圖 5> 明成王后의 翟衣
3. 朝服
高宗明成后嘉禮에서 妃父의 역할을 한 大院君의 복식중에서 朝服을 제작하였는데 필요한 세부 품목은 赤 衣, 赤 裳, 靑 中單, 赤 蔽膝, 大帶, 犀帶, 佩玉, 패대, 後繡, 笏, 襪, 靴, 金冠, 網巾, 長衫兒, 單衫兒, 把持, 單把持로 설정하였다.
赤 衣와 赤 裳, 赤 蔽膝은 紅色繒으로 만들었는데 赤 衣와 赤 裳 가장자리에는 玄色의 에다 백색 線을 두르고 반박음질로 상침하였다. 靑 中單에도 玄色 을 둘렀다. 大帶는 白色繒에다 玄色繒으로 가장자리를 둘러 제작되었고 코뿔소 뼈로 犀帶를 만들었다.
佩玉에는 각각 금구, 형, 거, 우, 중형이 1개씩 그리고 충아가 4개 쌍적이 2개 쌍황이 2개씩 그리고 약옥주 150개씩이 소요되었으며 이것은 청색 패대에 고정되었다. 후수에는 금환 2개가 달렸고 매듭망 1개 그리고 手刺繡로 제작된 雲鶴繡로 장식되었다. 笏은 象牙로 제작되었고 말은 백색면으로 제작되었다. 보통 朝服에는 鞋를 신으나 대원군의 朝服 着用 肖像畵를 보면 목화를 신고 있어 목화로 제작하였다. 金冠에는 조영과 금잠으로 구성되어 있고 푸른색줄이 금잠에 3번 감겨져 내려와 턱밑에서 묶인다. 長衫兒와 把持는 푸른색 비단으로 제작되었고 單衫兒와 單把持는 백색 비단으로 제작되었다.
<圖 6> 大院君의 朝服(前面)
<圖 7> 大院君의 朝服(後面)
<圖 8> 朝服의 後繡
4. 圓衫
圓衫은 王妃를 제외한 王世子嬪, 公主, 翁主 그외에 王室 宗親 夫人및 정경부인의 禮服으로 國末 皇后, 王妃의 禮服으로 격상된 복식이다.
府大夫人의 복식으로 제작된 圓衫의 세부적인 품목을 보면 圓衫, 裏衣, 胸背, 帶, 赤古里, 單赤古里, 속적삼, 紫色大 赤 , 藍色膝 赤 , 무지기, 단속곳, 다리속곳, 말, 혜, 그리고 어여머리, 비녀가 기본 품목으로 설정되었다.
圓衫의 表衣는 두록색 목단문단 12마가 소요되었는데 소매 윗부분과 아랫부분에는 수복문이 금박되었고 소매끝에는 청홍의 색동과 함께 백색의 한삼이 달렸다. 이의는 홍색단으로 제작하였고 아랫단 가장자리는 남색단으로 끝을 둘렀다. 흉배는 수자수로 봉황을 수놓았다. 대는 홍색단으로 만들었고 봉문을 금박하였다. 赤古里는 옥색주로 만들었고 單赤古里는 송화색주로 만들었으며 속적삼은 白鼎紬로 만들었다. 大 赤 은 紫的色紬로 만들었고 끝단에는 금박을 둘렀고 膝 赤 는 남정주로 만들었으며 금박을 끝단에 둘렀다. 무지기는 백저주로 만들었으며 단속곳, 다리속곳, 말은 백색주로 만들었으며 혜는 자색비단으로 겉을 대고 안은 백색주로 대었다. 어여머리에는 어염족두리와 함께 옥판떨잠 3개와 뒤꽃이 3개 비녀가 부속으로 부착되었다.
(前面) (後面)
<圖 9> 府大夫人의 綠圓衫
Ⅴ. 결 론
문화란 소유 대상이 아니라 존재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를 논하는데 있어 현사회에서 문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개항 이후 밀려드는 서구의 문화홍수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많은 부분 포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수성을 상실한 채 서구화, 보편화되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서구문화에 우리 문화가 종속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적, 국가적 문제라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 현재 우리 나라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복원하여 널리 알리는 각종 문화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高宗明成后嘉禮는 왕의 결혼식인 嘉禮라는 행사를 통해 예법이 유난히 발달하였던 朝鮮時代 王室의 엄격한 법도와 예법 그리고 王室의 의례복 제도를 잘 보여준 행사이다.
조선시대의 가례의식은 단순한 국왕의 혼례식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조선시대 치도의 이념인 유교의 예사상과 동양고유의 철학인 음양오행설이 완벽하게 구현된 국가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嘉禮時 입은 국왕과 왕비의 법복에 잘 드러나고 있다. 왕의 冕服에서 현의의 현색은 하늘을 상징하여 왕의 권위는 하늘과 같다는 치도 이념을 나타내고 있으며 동시에 陽을 의미한다. 그리고 법복으로 입을 때 착용하는 방심곡령 역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유교적 우주관을 상징하고 있다. 왕비가 입은 翟衣의 大紅色은 땅의 남방을 상징함과 동시에 陰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왕과 왕비의 법복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냄과 동시에 음양의 합일을 구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대원군을 비롯한 일반 문무백관이 입은 조복은 조선시대 관료의 의례복으로 유교중심의 법치국가인 조선의 관직제도의 체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綠圓衫 역시 조선시대 여인의 의례복으로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가슴과 등에 붙인 흉배에도 왕실을 상징하는 봉황흉배를 달아 왕실의 권위와 화려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嘉禮행사에 입혀진 冕服, 翟衣, 朝服, 圓衫의 형태와 그 속에 담겨진 의미는 오늘날 우리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다. 이것이 다시 그대로 입혀진다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산물이며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자랑스러운 정신적, 문화적 유산이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전세계의 국가, 민족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교통, 정보, 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보편화되면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만의 생활문화를 고집한다는 것은 불가능이 되었다. 그러나 서구중심의 세계문화속에서 우리는 이것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보존하고 나아가 세계문화속에서 변화 발전시킬 의무가 있다. 민족문화란 정지된 것이 아니며 또한 민족복식 역시 과거속 그대로 정지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존하여 계승 발전시킨다면 우리의 문화도 종속되거나 정지되지 않고 발전을 거듭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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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5.06
  • 저작시기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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