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궁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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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2. 본 론
1) 궁궐의 의미와 궁궐의 어원
2) 비원의 뜻과 역사
3) 비원의 구성
(1) 부용정과 부용지
(2) 영화당
(3) 주합루
(4) 애련정과 애련지
(5) 연경당

3. 결 론

본문내용

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주합루 정문 앞에 있는 어수문은 장대석을 잘 다듬어 심방석(心枋析)으로 하고 이 위에 심방목(心枋木)을 놓아 중앙에 네모 기둥을 단단히 세웠다. 기둥 양쪽에는 용지판(龍枝板)을 붙여 이것이 심방목에 짜물림으로써 문짝을 달았을때 좌우 두기둥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어수문 앞에는 소맷돌에 구름 무늬를 조각한 돌계단이 있고, 좌우에 지붕을 곡면으로 한 작은 문이 하나씩 있어 이들 모두가 합쳐져 주합루에 외삼문처럼 꾸몄다.
(4)애련정과 애련지
금마문 옆 담장 중간에 담장을 끊어 한장에 통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이 있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이북쪽 연못가에 애련정이 자리잡고 있다. 애련정은 숙종18년(1692)에 지은 것으로 정면1칸,측면1칸 되는 사모정인데 네기둥 가운데 남쪽전면의 두기둥은 연못속에 놓은 장주형 초석위에 세우고, 뒷쪽 북쪽의 두기둥은 장대석 한벌대 기단위에 놓은 운두가 낮은 다듬은 돌 초석위에 세웠다. 이익공의 건축양식과 부연을 둔 겹처마로 사모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 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정자 사방으로 두른 난간인데 초석 위쪽으로 계자각을 세워 이 위에 정자밖으로 돌출된 아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받치고 있어 정자안쪽에 걸터앉을 자리가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
또 연목 애련지도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하여 마무리하였는데 이 연못에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구의 처리가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애련정 안쪽 연경당 쪽에서 모아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한 장의 넓은 판장돌 중앙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물길을 따라 한 길 낮은 곳에 자리잡은 물확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뜨리고 이 물확에 가득 찬 물이 다시 연못에 흘러들게 한 것이다. 이런 수법은 비록 물확이나 그 주변의 모습이 다르다 하더라도 경주 안압지에 물을 끌어들이는 수법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주남철, 김종섭 <비원> P. 54 대원사 1990
(5)연경당
애련지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작은 연못이 나오고 이 서북쪽 터에 연경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에 당시 왕세자였던 익종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안에 지은 이른바 99칸 집이다.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은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27년 왕명으로 대리 청정을 하다가 순조 30년 (1830)에 세상을 떠났다. 그뒤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으로 추종되어 익종으로 종묘에 봉향되었는데 연경당은 바로 익종의 대리 청정 때 지은 것이다.
연경당 행랑채와 그 가운데 우뚝 선 솟을 대문인 장락문 밖 넓은 터는 행랑 바깥 마당인 것이다. 사대부 집에서는 대개 줄행랑과 솟을대문 밖 넓은 터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철이면 매미를 불러들이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무더운 여름철을 보냈다. 이곳 연경당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큰 느티나무를 한 구루 심고 주변에 도랑과 다리 그리고 석함, 대석 등의 석물들을 늘어놓았다.
한국의 전통 정원에서 석단, 화계, 기단 등 직선적인 구성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정원의 주체가 되는 정자, 누, 그리고 집 들의 모든 건축이 직선적인 구성을 하기 때문에 개천의 흐름을 곡선으로 둔것은 이와 조화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3. 결 론
이처럼 창덕궁 비원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부연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후원은 단지 정원의 의미 뿐만아니라 왕이 여가와 복잡한 현실속에서 벗어나 욕심을 버리고 마음으로 사색을 했던 장소이다.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이라는 버젓한 정궁을 두고도 그보다 작은 창덕궁의 비원에 머물기를 좋아했던 까닭은 자연의 지세에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고 그에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경북궁처럼 좌우 대칭과 같은 정연한 구도가 아니라 인공이 아닌 자연, 기계적인 삭막함이 아니라 따뜻함과 섬세함이 알게모르게 묻어난다는데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정원못지않게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비원 안의 건물들 또한 그러하다. 부용정, 영화당, 애련정 , 연경당등도 그런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무와 벽돌로 집을 짖고, 얇은 창호지로 창과 문을 만들어 밖의 자연의 소리와 함께 동화되고, 햇살의 따사로움 또한 창호지를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란 어느 나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라 생각한다. 안과 밖이 자연스레 보이는 낮은 담장, 마루 또한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애써 보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이는 그런 점들이 우리나라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동화되려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원도 조선시대의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국 초부터 개발되어 왕들이 게속 고쳐가며 사용한 것은 어느 궁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과의 자연스러움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의 비원은 70년 중반까지 일반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닐때와는 달리 안내원을 따라서 한시간 정도 돌아보는 것으로 비원을 관람할 수 있다. 이런 어느 한 순간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다니며 모든 것을 음미하여 오랜시간 동안 깊은 공간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어느 나라든지 정원이 있고 그것을 가꾸는 일은 있지만 우리나라의 정원은 사뭇다르다. 일률적이고 인위적인 외국의 정원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정원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바로 자연 그 자체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조경일, 설계를 하고 나무를 심는 따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의 여운을 만들어내는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여운과 자연과의 동화는 우리나라 비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 고 문 헌
1. 이강근저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2. 주남철, 김종섭저 <비원> 대원사 1990
3. 권삼윤저 <우리건축 틈으로 본다> 대한교과서 1999
4. 류경수저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들> 대원사 1998
5. 장경호저 <한국의 전통건축> 문예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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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20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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