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주의 개념과 타사상과의 차이점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재건주의의 개념 및 정의

Ⅱ. 재건주의의 배경

Ⅲ. 재건주의의 교육 원리

Ⅳ. 재건주의에 대한 비판

Ⅴ. 재건주의가 우리 나라에 끼친 영향

본문내용

를 단일화했다.
한편 재건국민운동 도지부와 각 단위 촉진회는 조직 정비와 발맞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재건국민운동 도지부가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은 무의촌 진료사업이었다. 도립병원에서 의약품을 지원받아 모슬포 군부대 군의관들과 함께 실시한 무의촌 진료는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중산간 지역 주민들에게서 호응을 얻었다.
입영예정자들에 대한 문맹퇴치 교육도 전개됐다. 1962년 당시 입영예정자 가운데 문맹자가 149명으로 판정됨에 따라 재건국민운동 도지부는 이들 전원을 교육했으며 문맹자가 모이는 곳이면 강사요원을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이와 함께 영농개선, 미신타파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금주운동, 가정의례 간소화 등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중산간도로 개설이 재건국민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1963년부터 3년에 걸쳐 개설된 이 도로는 175.633㎞에 달하는 중산간지역의 ‘동맥’으로 청년.부녀회원들이 주력으로 취역해 이뤄졌다. 당시 원조받은 밀가루로 노임을 지급했기 때문에 밀가루로 칠해서 만들어진 도로라고 해서 ‘밀가루도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관 주도의 밀어붙이기식 추진이 크게 작용했지만 각 지역 촉진회장들과 읍.면.동 간사들의 노력과 마을 청년.부녀회의 자발적인 협조도 한 몫을 했다.
한편 1964년 8월 재건국민운동 조직이 관 주도에서 순수 민간단체로 전환됨에 따라 제주에서도 조직개편이 이뤄졌다.
재건국민운동 제주도위원회는 민간기구 전환 이후 공채된 직원들이 대거 이탈해 인력난이 심각해진 데다 재정 자립기반이 미미해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해 나갔다.
이후 1970년대 들어 행정 주도로 마을금고 설치운동이 본격화되자 마을금고 창립과 육성에 주력하다 1975년 11월 25일 해체됐다.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
재건국민운동이 전국을 휩쓸면서 대학생들도 농촌계몽활동에 가세했다.
1961년 7월 22일 서울대 향토개척단 소속 11명이 제주의 농촌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방학이 시작되면서 경희대 고려대 건국대 해양대 수도여사대 등에서 학생들이 속속 내도했다.
제주 출신 재경학우회에서도 방학을 이용해 회원을 총 동원, 농촌계몽 및 봉사활동에 동참했다. 이들은 향토개척단, 계몽반, 봉사대 등 이름이 제각각이었지만 농촌계몽을 통해 잘 사는 농촌을 만들자는 목표에서는 같았다.
이들은 대부분 재건국민운동 도지부의 협조로 상주하며 4-H 지도자에 대한 교양지도를 하는 한편 문맹퇴치활동, 농어촌 실태조사, 노력봉사 등을 했다.
여대생들은 생활개선사업, 빈곤한 어린이에게 옷 지어주기, 상비약품 보급과 치료 등 자신들에게 맞는 봉사활동을 벌였다.
대학생들의 농촌계몽활동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부에서는 제주도 농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오히려 순풍양속을 해칠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계몽반원들이 겸손. 검소하게 활동에 임한 데다 준비한 학용품과 대중도서를 나눠줌으로써 농민의 신임을 받아 이 같은 우려는 한가지 기우로 끝났다.
특히 예전에는 내도한 대학생들의 경우 마을을 돌며 계몽활동을 전개했으나 대부분 일정 마을에 머물며 활동에 임해 농민들과 정을 쌓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제주일보(당시 濟州新報)는 계몽반원들이 짜인 일과에 따라 움직이면서 손발이 부르틀 정도로 열의를 보여 그 기대 이상의 성과에 농민들이 신망과 찬양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재건국민운동은 학생들에게 낙후된 농촌을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에도 농촌을 찾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계속됐다.
3. 새마을 학교운동(새교육운동)
8.15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일제시대의 획일적 수업방법을 비판하고 아동의 개성을 중요시한 교육운동, 정부*교사*민간단체에서 학습지도방법연구*교육과정개편*교과교육연구*향토학교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사상적 배경은 아동중심 교육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교육, 특히 J.듀이의 교육철학에 영향을 받는다. 1946년에 오천석은 하기교원강습회에서 듀이를 비롯하여 미국 교육학자의 교육이론을 소개했다. 같은 해 서울사범학교와 서울여자사범학교의 공동주최로 초*중등학교 교원강습회가 개최되어 국어과* 사회생활과 등 교과에 대한 교수방법에 관한 내용을 강습 받기도 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교원 강습회를 통해 각 교과의 학습지도법을 연구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학생의 흥미와 개인차를 고려하는 학습방법이 소개되었다. 본격적으로 새교육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교육! 법’이 제정된 이후인 1950년대 초반이었다. 6.25전쟁중에도 <새교육>이라는 월간잡지가 발간되어 새교육에 대한 계몽활동을 벌였고, 이전의 교수법을 중심으로 하는 교사연구*강습회*연구회 활동 이외에 교육과정 자체를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그 결과 1952년부터 ‘교육과정심의회’를 발족시켜 학교교육과정을 심의했고, 1954년 4월에 국민학교, 중학교, 야간제 중학교, 고등학교, 사범학교 등 각급학교의 ‘교육과정시간 배당 기준표’를 제정했다. 이와 함께 교육방법의 개선을 위하여 연구학교제도의 실시, 단원학습, 교육평가, 시청각교육, 특별활동 등에 관한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학습활동 이외에 학생의 소질과 능력에 기초하여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활동에도 관심이 높아져서, 1955년 8월에 ‘대학생지도자협의회’가 발족되었고, 1962년 3월 서울대학교에 학생지도연구소가 설치되었다.
1956년경에는 듀이의 <학교와 사회>1899, E.G.올센의 <학교와 지역사회>1945등이 소개되어 학교와 지역사회의 유대를 강화하는 지역사회학교운동에 대한 논의가 일기도 했으나, 새교육 운동은 1950년대 말부터 차츰 약화되었다. 그 이유는 국민학교 상급학년이 되면 중학교 입시준비가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의 강의식 수업방식이 계속 잔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원들 자신도 새로운 교육철학과 학습 지도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새교육운동을 단순한 미국식 교육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더욱이 교육재정의 지원도 충분하지 못했고 교육행정이 관료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키워드

  • 가격5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3.11.01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005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