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와 기마민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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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나일본부와 기마민족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임나일본부`의 연구 동향과 문제점
1. 임나일본부 개관
2.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사
3. 최근의 임나문제 연구와 비판
4. 결론 및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

2>기마민족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낙동강 중·하류지역의 가야시대 고분에서는 현재 기병용의 계갑 등 상당한 숫자의 馬具類와 武具類가 발견되고는 있으나, 그 제작연대는 대체로 5세기 전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셋째, 에가미 나미오가 말하는 왜·한 연합왕국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다. 에가미 나미오는 북방에서의 남하한 기마민족집단이 한인과 왜인을 정복하고, 왜인들의 본거지인 일본으로 끝까지 추적하여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왜·한 연합왕국을 건설했다고 본다. 에가미 나미오는 이것을 몽고족의 예에서 보듯 기마민족은 자기들이 정복한 족속의 본거지에까지 손을 뻗쳐 최종적인 항복을 받는 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육상생활이 주축인 기마집단들이 바다 건너에 거주했던 왜인들에게까지 공격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술과 항해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4세기 초에 과연 대량의 兵馬가 바다를 건널 수 있었는가도 큰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辰王의 문제이다. 한국 역사학계의 지식으로는 삼한세력의 聯盟長으로서의 진왕이 출현한 것은 200년을 전후한 시기이며, 또한 그가 직접 다스렸다고 하는 目支國은 마한의 어느 한 나라일 뿐 결코 가야지방에 있던 나라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가미 나미오가 진왕을 퉁구스계통의 정복왕으로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통치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기마민족설은 일본의 고대국가와 민족의 기원을 동북아시아 및 한반도와 관련하여 추구하려 한 점과 전통적 皇國史觀의 틀을 과감히 벗어난 점에서는 참신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학계에서 그들의 민족 원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가설이기 때문에 이들 주장에는 애초부터 한국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는 한국 학계의 입장에서는 그 오류를 지적할 수 없게 되고, 과거 일제하의 식민사학자에 의해 강요되었던 '日鮮同祖論'과 같은 논리를 극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설'의 경우 종래에 주장되었던 '任那日本府說'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는 듯 하지만 일본열도내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북구주를 정복한 崇神의 호칭인 '御間城入彦(미마키 이리비코)란 가야를 일컫는 미마나(任那)인 '미마' 지역의 궁성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결국 에가미 나미오는 임나일본부설의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나아가 교묘한 논법으로 그 역사적 근거까지 제시하고 있다. 기마민족설은 어떻게 보면 과거 일본학계의 이른바 '日鮮同祖同源論'의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참 고 문 헌
『한국사 시민강좌』11집, 일조각, 1992.
천관우,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17.
부산·경남역사연구소 고대사연구부, 『시민을 위한 가야사』, 집문당, 1996.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
  • 가격1,5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3.11.20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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