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하회마을에 대한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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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동하회마을에 대한 모든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하회마을의 중요 문화유산>>

<<하회마을의 고택들>>
양진당(養眞堂) - 보물 제 306호
하회 남촌댁(河回南村宅) - 중요민속자료 제 90호
하회주일재(河回主一齋) - 중요민속자료 제 91호
하회 류시주가옥(河回柳時柱家屋) - 중요민속자료 제 87호
작천고택(류시주가옥) 중요민속자료 제87호
귀촌종택

<<하회마을의 노거수 >>
화수당(花樹堂) 노송(老松)
삼신당 느티나무

본문내용

었던 옥류동은 구렁의 바위틈에서 사철 맑고 시원한 '옥류천(玉溜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최근까지 동민들은 물론 외지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한다.
현재 옛터 아래에는 헛제사밥을 팔고 있는 숙박과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영업집인 '옥류정'이 자리잡고 있고, 그 맞은편에 별도의 건물인 예술관이 서 있는데, 서애 선생의 후손으로 안동문화원장을 역임한 하남(河南) 류한상(柳漢尙)씨가 사군자 지도와 작품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당정(泉堂亭)
이 정자는 하회마을 화산 서록(西麓)에 있었는데, 사간(司諫)을 지낸 안팽명(安彭命, 1447~1492)이 독서하던 곳이다. 서쪽으로는 옥연정사를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학가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는데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안동의 가장 오래된 읍지인 '영가지'에도 이 정자가 기록되어 있다.
서림정(西林亭)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선생께서 독서와 휴식을 취하던 유서깊은 장소이다. 하회 서쪽 뚝에는 무성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느티나무 세 그루만 남아 있다. 특별히 정자가 지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림정 맞은편으로는 돌고지와 상봉대(현재 翔鳳亭이 남아 있다) 그리고 원지산(遠志山)이 보인다.
<<하회마을의 각, 당, 묘>>
정부인(貞夫人) 정려각(旌閭閣)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여 세운 비(碑)를 정려비라 하며, 하회마을로 들어오는 큰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도로의 동측에「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과 서측에「풍산김씨정려각」이 있다. 「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에는 정부인영양남씨(貞夫人英陽南氏)와 공인문소김씨(恭人聞韶金氏)의 정려비가 함께 있다. >>상세보기
서낭당(성황당)
하회마을의 주산(主山)인 화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는 서낭당은 매우 초라해 보이는 1칸 짜리 오두막이다. 이 서낭당은 하회의 터주로서, 하회 별신굿의 신앙적 본향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신당
화산 기슭의 서낭당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위치한 국사당은, 국시당 또는 국신당으로도 불린다. 서낭당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모양으로, 원뿔 모양의 지붕을 갖고 있는 정방형의 1칸 짜리 오두막이다.
전서공 비각과 묘
전서공은 풍산류씨 제7세로서, 조선조 초에 가선대부 공조전서의 벼슬을 잠시 하다가 고향인 풍산에서 은거 중 그 곳이 자손만대가 살아갈 삶터로 적합하지 않으므로 명당을 찾다가 이곳 하회를 발견하고 관찰한 끝에 허씨와 안씨의 삶터를 피하여 숲과 늪을 개척하여 자손의 삶터를 마련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기려서 자손들이 세운 비(碑)이며, 묘소는 원래 풍산에 있었으나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화산중턱의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모셔졌다.
야거위(野居位) 묘
야거(野居)는 풍산류씨 제9세로서,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름이 전하여지지 못하고 어릴 때에 이름 대신 부르던 자(字)가 야거이다. 일찍이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의성 사촌의 김감목(金監牧)공 댁으로 초행을 가서 혼례를 올리던 도중에 병이 나서 위독하여 혼례를 다 치르지 못하고 돌아오자 곧 운명하였다. 그 후 김씨 댁에서는 혼례도 치르지 못한 따님인지라 다른 곳으로 혼인을 시키기로 하고 혼처를 물색하였는데, 그 기미를 알아차린 따님은 비록 혼례를 다 치르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혼인에 대한 약속은 모두 치러진 처지인데 어찌 다른 곳으로 개가를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미 풍산류씨댁 사람이므로 시댁에 가서 살리라.하고 데리고 살던 몸종 하나를 데리고 밤에 몰래 집에서 빠져 나와 하회로 오고 말았다. 그 후 80여세가 되도록 정절을 지키다가 돌아가셨으므로 내외분을 함께 합폄
(合 :함께 묻음)하여 모시고 해마다 문중에서 제사를 드린다. 그 후 데리고 살던 몸종도 죽었으므로 야거위묘의 윗터에 묘를 만들어 이 두 묘가 웃골에 아래위 나란히 모셔저 있다.
피천석 묘
풍산류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기 이전에 가난한 안씨 집안의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길거리에서 헐벗은 객승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일으켜 집으로 데려와서 극진히 치료하여 원기를 회복시켰다. 객승은 노부부에게 보은을 하려 하나 가진 것이 없으므로 다만 후세를 위하여 묏자리를 잡아 드리고자 하는데, 두 곳의 묏자리 중 한 곳을 원하는 데로 잡아주겠소. 한 곳은 자손 중에 3정승이 태어날 수 있는 터요, 또 하나는 당대에 천 석의 곡식을 거두어 부자가 될 수 있는 자리요.하였더니 워낙 가난하게 살아온 처지라 나중에 정승보다 우선 가난을 면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천 석을 거둘 수 있는 묏자리를 잡아줄 것을 원하였다. 객승은 지금의 「노가리」 옆 서쪽 산 「부게」쪽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초상이 나서 객승이 잡아준 자리에 묘를 썼더니 그 해에 큰 홍수가 나서 강에 넓은 갯벌이 만들어 졌다. 그 곳을 개간하여 온 들에 피를 심어 가을에 추수하니 천 석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묘를 「피천석 묘」라하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회마을의 노거수 >>
삼신당 느티나무
마을중앙의 삼신당에는 수령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를 잘못 건디리면 동티(-재앙)를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으며, 풍산류씨 입향 시조전서공(典書公)께서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서낭당, 국사당과 함께 삼신당은 풍수지리상 마을의 혈(穴)에 해당하는 곳으로,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정월과 대보름에 마을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여기서 이루어 졌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곳이다. 이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나, 관광객들이 무심코 뿌리를 밟고 다니면 벗겨질 위험이 있으므로 밟히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함이 시급하다.
화수당(花樹堂) 노송(老松)
연좌루에서 내려다보면, 서쪽 건너편에 는 수령이 수백년 이상된 노송이 세월의 풍상(風霜)을 견디어 가며, 홀로 남아 있다. 이곳에는 그 옛날에 화수당이 있었으며, 사립동화학교가 있어서 3.1 독립운동 시에 이 소나무 앞에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립동화학교가 폐교되고 풍남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었으며, 광복 후 풍남국민학교로 되었으나, 그 후 학생의 부족으로 분교에 오히려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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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7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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