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츠네의 불화가 가마쿠라막부의 성립과정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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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불화
1) 요리토모(頼朝)와 요시츠네(義経)의 출생과 만남
2) 겐페이 전쟁(源平戦争)
3) 두 형제의 불화와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
4) 요시츠네(義経)의 죽음
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불화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성립에 미친 영향
1) 슈고(守護), 지토(地頭)의의 확립
2) 후지와라씨(藤原氏)의 토벌

Ⅲ. 결론

본문내용

데, 양위 후 출가한 경우에는 태상법황(太上法皇) 또는 법황(法皇)이라 불렀다.
또는 법황이 정무를 보는 곳)의 명령으로 '반역자 요시츠네를 색출하라'는 전갈을 히데히라에게 보냈다. 그러나 히데히라는 그 전갈을 무시하고 은밀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가 1187년 무렵이었다.
요리토모는 거듭 원청의 명령을 전했으나 히데히라는 여전히 이 명령에 따를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그해 가을 10월 히데히라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야스히라(泰衡)가 그 뒤를 이었다. 야스히라가 뒤를 이은 후에는 형제간의 내분도 있었고 일족간의 의견도 통일되지 않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요시츠네를 색출하라는 독촉이 내려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무런 응답이 없자, 1189년 2월 요리토모는 천황에게 야스히라 토벌의 명령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궁지에 몰린 야스히라는 마침내 요시츠네를 체포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요시츠네는 스스로 자결을 한다.
요리토모는 요시츠네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도 후지와라씨의 토벌을 중지하지 않았다. 1189년 7월 가마쿠라를 출발한 28만의 대군이 마침내 야스히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요리토모는 동북 지방마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요리토모는 9월 8일 야스히라의 토벌과 함께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교토의 조정에 보고하고 이어 14일에는 정복한 지방의 행정에 착수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수년에 걸친 내란이 비로소 종식되고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정권이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192년에 요리토모는 정이대장군
원래는 8세기말 9세기초 주변지역 정벌을 위해 두었던 임시관직으로, 헤이안 시대 말기에 부활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연 이후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쇼군(將軍)'이라 부르는 것이 정이대장군이다. 가마쿠라막부 시대에는 미나모토(源) 씨, 무로마치막부 시대에는 아시카가(足利) 씨, 에도막부 시대에는 도쿠가와(德川) 씨가 정이대장군이 되었다.
의 지위에 올랐다.
Ⅲ. 결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비록 어머니가 다르지만 한 형제였다. 그 두 사람은 처음에는 '타도 헤이시'라는 같은 뜻을 품고 서로 협력하며 일을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요시츠네가 단노우라에서 헤이시를 멸망시키고 교토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냄으로써 요시츠네의 명망이 요리토모를 압도했으며, 요시츠네가 적이었던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이유 등으로 요리토모와 요시츠네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앞의 경우 말고도 다양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한 것은 역시 조정의 이간질이었다. 조정에서는 조정의 힘을 능가하는 강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요리토모와 요시츠네의 사이를 벌려놓음으로써 세력의 균형을 도모한 것이다. 이러한 조정의 의도대로 두 사람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갔고, 급기야 서로를 죽이고자하는 계획을 세운다. 요리토모의 입장에서는 요시츠네를 그냥 놔두면 막부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고, 요시츠네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형에게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요리토모의 세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손을 쓸 수 없었고, 요시츠네로써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요시츠네가 자결함으로써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났다. 이처럼 요리토모는 권력을 잡은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가차없이 토벌했다. 그 상대가 자기 동생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요리토모는 막부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둘 수 있었다. 막부 중앙기구도 정비하였고, 조정으로부터 슈고와 지토의 설치도 인정받았다. 또한 오슈의 후지와라씨를 토벌함으로서 동북지방의 지배권도 손에 넣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통치력으로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두 사람의 불화에 있어서 최고 희생자가 된 것은 동생인 요시츠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있어서 상당히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즉, 요시츠네 개인으로 보면 두 형제의 불화가 상당히 비극적인 일이었으나, 막부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위업의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의 불화는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서론에서 밝힌 바 있듯이, 가마쿠라 막부는 무사 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의 단면이다. 그리고 이러한 막부의 성립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 속에서 요리토모와 요시츠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통해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과정을 알아보는 관점이 상당히 중요함을 밝힐 수 있었다.
Ⅳ.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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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 사이트: www.yahoo.co.kr / www.empas.com
검색어: 미나모토노요리토모, 미나모토노요시츠네, 가마쿠라막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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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3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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