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탈리아와 독일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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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 이탈리아와 독일의 도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 론 -
1. 도시가 유럽에 미친 영향
2. 중세 도시의 성립 과정

- 본 론 -
3. 이탈리아 도시국가 성립배경
4. 이탈리아 도시국가 쇠퇴
5. 중세말의 독일
6. 독일의 도시 분포지
7. 독일의 도시 동맹
8. 도시와 국가

- 결 론 -
9. 이탈리아, 독일 도시의 차이점

본문내용

도 배출되었다. 도시와 하급재판권 관할지의 행정단위는 코뮌적인 과세 공동체였다. 1480년의 전거에 따르면 도시의 대의원들은 전체 하급재판권 관할지를 공동으로 대변하여만 했다고 한다. 도시와 하급재판권 관할지는 영방 군주의 대리자, 도시의 재판관, 그리고 도시와 촌락의 "피 보호자" 즉 명망 있는 계층 아래 존재하는 계층들을 대변해야 했던 도시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각각 한 명씩을 파견했다. 뷔르뎀베르크에서 신분제적 권력이 최초의 절정에 이른 것은 1498년 통치능력이 없는 궁작인 에버하르트가 영방 신분제 의회에 의하여 퇴위된 사건이었다. 1503년까지 4명의 고위성직자, 4명의 기사 그리고 4명의 도시 대표자들로 구성된 통치자문위원회가 통치업무를 관장했다.
⑤ 남동부의 도시와 시장, 신분제의회
독일의 남동부, 다시 말해서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의 영방 에서는 신분제적 대표권 행사에서 귀족의 영향력이 우세했다. 여기에는 도시와 병행하여 시장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위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보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형태로서- 이미 그 성격이 규정된 바 있듯이 - 의도적으로 열등한 헌법을 가진 도시와 농촌의 중간형태를 띄기도 했다. 저지 오스트리아에서는 지배적인 도시의 수가 영방 제후의 수보다 훨씬 우위를 점하였고 13세기 말 ∼14세기 초에는 영방 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 예를 들어 영방 평화령의 결사들 - 에 의해 중심지가 확산되고 1500년경에는 영방 의회에서 대표권을 행사하는 약 35개의 도시와 216개 정도의 시장지가 있었다. 1500년 이전에 도시 대표단은 영방 제후가 지배하는 단 4개 도시와 2개 시장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엔스 강변에 위치한 영방 에서는 영방 분제 의회대표단으로부터 자립해 있었다. 저지 오스트리아와 반대로 15세기에 영방 제후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도시들은 영방희외에서 대표권을 행사했는데, 이곳에는 오랫동안 영방 신분제의회에서 대표권을 행사하는 그러한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슈타이어 지방의 영방의회의 도시대표단 안에는 영방 제후가 지배하는 도시와 시장이 균형을 유지했다. ( 1500년에는 도시 14개에 시장 14개였다 ). 케른텐에서는 도시의 참여가 뒤늦게야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잘츠브르크에서는 도시 대표단과 시장 대표단의 기증이 확대되어 임시로 영방 재판소의 권리까지 행사했다. 티롤지방 영방 제후가 지배하는 도시들은 14세기 비텔스바흐가문, 룩셈브르크가 합스브르크 가문간의 영토를 둘러싼 쟁투가 벌어지는 동안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결 론 -
9. 이탈리아·독일 도시의 차이점
이탈리아는 지리적 위치의 유리함과 다른 유럽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먼저 봉건제도가 무너짐으로써 귀족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특징과 국제 무역의 발달로 인한 상업자본가의 힘이 커지는 경제적인 측면으로 인해, 도시가 급속도로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 전체에 전반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지속적으로 경제적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도시의 부흥과 발달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노예제 생산양식과 봉건적 생산양식의 기반이 서로 완전히 달랐던 사실이 도시와 농촌사이의 관계가 서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통해 주변의 농촌과 도시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구 격감과 불황은 상업의 침체와 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지고 제조업의 생산량이 줄어들게 한다. 갈 곳을 잃은 무수한 자본은 건물 투자나 사치스런 지출, 그리고 부동산으로 향하게 되며, 15세기에는 전제정에 영향을 받게 되어 새로운 형태의 궁정과 군주의 출현으로 공화국이 손에 넣게 되었던 본토의 영토들을 근대적인 또는 통일적인 국가로 통합시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이로써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대부분의 도시 공화국들이 모습을 감추어 버리게 된다.
반면에 독일은 정치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으로 인한 도시 발달은 이탈리아에 비해 매우 취약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도시는 지리적인 형태 즉, 신·구독일 지역과 남부지역으로 또, 남부는 남서부와 남동부로 나뉘어지는데, 구 독일 지역의 도시는 제국도시, 사교 도시였고, 신독일 지역의 도시들은 시민도시(Burgerstadte) 또는 건설(Grundungstadte)도시였다. 남동부 지역은 신분제 국가의 형태를 띄기도 하고 때로는 제국 도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도시 발달은 동맹 적인 형태의 도시동맹 즉, 라인동맹과 쉬바벤 동맹 그리고 북부 독일의 한자동맹의 형태로 도시가 발달하였음을 통해 이탈리아와는 다른 형태로 도시가 발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524∼1525년에 독일에서는 대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13세기부터 장원제도가 무너짐과 동시에 독일 농민의 자립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봉건적 지배권의 위협을 가했으며, 전후에 대한 중한 벌금이 부과되어 중소 영주와 제국 도시의 세력은 실추되었고, 영국을 비롯하여 강력 화하기 시작한 국민국가가 중상주의적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자 독일의 도시는 쇠퇴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서로 다른 형태로 도시가 발달했으며, 중세후기로 갈수록 도시는 쇠퇴하고 절대주의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았다. 즉, 이탈리아 도시는 국가의 분립 형태로 결정되었고 장차 군주제 영역국가로 발전했으며, 독일은 영방 국가(신분제의회)에서 제국 도시 안에서 이탈리아보다 느린 형태로 절대국가로 발전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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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피렌느 , 강일휴 , 중세 유럽의 도시 , 신서원 , 1997
·메리 풀브룩 , 김학이 ,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 개마고원 , 2000
·페르낭 브로델 , 주경철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 일상 생활의 구조 下 ' , 1996
·월레이스 K 퍼커슨 , 김성근·이민호 , 대한교과서주식회사 ,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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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29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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