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한스와 그레텔'을 읽고 - 허구적 역사에 매진하는 자아의 폭력성에의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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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자신에 게 휴식을 주자? 이 손을 깨끗하게 지키자고 한 것이 잘못이라고? 이 손이--- 이 손이--- 사랑은--- 사랑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을까? 사랑이란- 다른 사랑을 죽인 피묻은 손만으로 얻어지는 그런 것이었을까? 그것은 언제나 죄의 과실이었을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했다. 아무것도, 30년이나 이렇게 생각해 왔는데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 않은가?
(페이지 41)
[보르헤르트] (전략) 내자신의 죄를 저질렀다, 30년의 감금의 뜻을 이제 알겠다,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벌이었다-편안하군---- 이제 비로소----(더 밝아지는 조명, 걸어다닌다)----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책임은?----여전히 중요한 문제다----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 남는게 옳겠지----그러나 어쩐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아니 중요하다. 여전히, 그러나 무어랄까----(보르헤르트, 갑자기 무거운 걸음걸이로 걸어가서 다른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는 시늉을 한 후, 자신이 의자에 앉는다, 그런 다음 얼른 자신은 일어선다. 정중하게, 연극처럼) 그렇게, 그 책임을 위해 당신은 거기 남아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르헤르트씨---- 그러나 나는(뒷걸음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그때, 한방의 총소리였거나, 혹은 명석한 정치적 판단을 나타내는 행동을 하지 못한 이, 또 한 사람의 한스 보르헤르트는, 그레텔에게 돌아가렵니다. (중략)
(페이지 44)
여기서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보르헤르트를 가두고 있는 간수 X 역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감옥 속에 갖혀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X는 보르헤르트의 억지 논리에 상당 부분 동참하며 허구적인 역사와 논쟁에 매진하며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다. X는 자신이 시인하듯 보르헤르트라는 존재를 가두는 자이며 동시에 보르헤르트 때문에 갇힌 자이기도 하다.
[X] (전략) 간수의 절망,-이라는 것은 그닥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제목이겠지요? 그러나 존재합니다. 모든 간수들에게. 가두는 사람은 갇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페이지 10)
간수 X는 구속의 경계 바깥에 있지만 그다지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X의 상황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감옥 바깥에 있거나 가두는 자라고 해서 죄수보다 자유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X는 한스 보르헤르트라는 존재가 체제와 이념의 논쟁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유를 구속받는 또 다른 피해자이다. 사실상 희곡의 진짜 주인공은 보르헤르트라는 관념상의 적을 만들어 이데올로기라는 감옥 속에 가두어 놓고 사육하면서 나오지 못하게 지키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간수인 X이며 그 X는 자신은 간수로서 감옥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감옥 속에 있는 죄수 못지 않게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은 어떤 이유로든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상의 모든 전쟁은 전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입장에서 윤색되고 미화되어진다. 보르헤르트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분리되지 않은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연합군의 태도를 비난하거나 히틀러가 식민지의 원주민이었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땅으로 만든 미국민들의 태도를 비난하며 전쟁을 벌인 이유를 변명하는 것은 일견 정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희곡에서의 한스는 전쟁에서의 패자임에도 불구하고 30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을 포함한 나치당원들과 독일국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연합국 측에 의해 윤색된 역사에 대항하여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히틀러가 연합국 측과 행한 협상의 유일한 산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명분 아래 2차대전과 유태인 학살의 모든 책임은 히틀러 한사람과 연합국 측에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끝까지 자신의 그 같은 고집을 꺾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집이 역사적인 사실과 배치되는 허구이며 억지라는 점은 앞의 정리에서 나름대로 설명이 되리라 본다. 유태인 학살의 책임을 연합국 측에 떠넘기는 논리는 사실상의 역사적 기록과 배치되는 억지이며 책임의 행방을 따지고 전쟁의 원인을 옹호하는 와중에 전쟁과 살상을 당연시하는 논리로 귀착하는 것이다. 결국 한스와 X간의 이념논쟁은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아전인수격의 억지 논리에 불과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희곡 속에서 벌어지는 한스와 X 간의 유창한 이념 논쟁과 웅변 시합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 하고 그 같은 웅변을 구사할 능력이 없으며 전쟁의 피해자로서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 희곡은 최종적으로는 폭력성에의 의도적 외면이 빚어낸 자아의 비극이다. 결국 논쟁은 수 없이 많은 철문으로 가로막힌 자아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아 안에서 끝난다. 개인이 사회적 현실과 유리될 수는 없다. 개인의 가치는 집단의 가치와 어떤 방법으로든 상호 작용한다. 한스 보르헤르트는 전쟁의 와중에 파묻힌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인물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남북 분단의 현실과 동족 상잔이라는 한국전의 기억을 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분단국가의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폭력성으로부터 유리된 민주국가의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개인의 문제이다. 인간이 과연 폭력적인가 따위의 본질적인 질문이 여기서 해답을 얻지는 못 한다. 다만 자아에 내재한 폭력성을 외면하던 개인이 마침내 자신이 은연중에 저지른 폭력을 인정하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전쟁이라는 집단과 집단간의 폭력성의 충돌에 상당히 유리되는 동시에, 지금의 우리는 조폭 영화와 학원 폭력 만화에 사회와 개인의 폭력성을 분리한다. 사회는 개인의 폭력성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거나 외면하며 인간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묵살시킴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추구한다. 한스 보르헤르트는 보리수를 틀어놓고 600만이라는 피상적 셈으로 그 참혹함을 외면하는, 어찌 보면 그런 면에서 현대의 폭력성에서 개인을 의도적으로 유리시키는 현재의 사회 제도, 인간 군상과 연결성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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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30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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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6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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