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중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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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중국의 고대 문화

2. 위. 진. 남북조 및 수.당 제국의 역사

3. 송.원.명.청의 시대

4. 중국 근현대사

5. 일본의 역사

본문내용

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에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하여,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 교육, 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수는 급증했다.
대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막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의 아즈치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했다.
오다의 부하 토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하고, 새로 축성한 오사카성을 거점으로 삼아 1590년 전국통일을 완수했다. 토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꾀했다. 대외정책 면에서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한편, 고아, 루손, 대만에 조공을 요구했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했다.
히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는 세이다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정권보다도 강력했던 에도막부는 260여년간 계속된다.
5-2.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 역시 미국의 침입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근대로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그 자극을 효과적으로 수용해서 조속하게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전환하였고 아울러 산업의 발전에도 성과를 거두면서 반식민지로 될 위기에서 벗어나 오히려 우리나라와 중국 등을 침략한, 동아시아에서는 에외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대중의 권리는 무시되고 천황에 권력이 집중된 국가체제를 갖추어 내부적으로는 군국주의,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에 개항을 강요받은 뒤 일본에서는 막부권력이 무너지고 메이지유신이라 불리운 위로부터의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이묘들이 몰락하고 번이 해체되면서 근대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천황을 최우위에 놓는 헌법에 의해 국민의 정치참여는 배제되고 전체주의국가로 나아가는 길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내부의 갈등을 조선 등 인근 국가에 대한 팽창정책에 의해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1840년대에 청이 영국에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완화되던 중, 1853년 6월과 185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내항하여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각과 통상을 요구했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론이 우세했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린 막부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시모다, 하코다테의 개항과 미국대표의 일본주재가 허용되었다. 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과도 같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쇄국체제는 끝났다.
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의 종용에 따라, 일본은 1858년 6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는 영사재판권이 인정되고, 일본에게는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막부는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67년 12월 천황조정이 막부의 폐지와 신(新)정부의 성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를 공표한 후, 막부와 신정부군 사이의 내전인 무진전쟁이 벌어졌다. 신정부군은 1869년까지 구(舊)막부군을 모두 항복시켰지만,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과 여론의 존중, 개국화친 등 신정부의 기본정치이념을 선언했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연호를 메이지로 정했다. 1869년 천황조정이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이라 한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청국군의 출동으로 실패한 후, 자유민권파는 무력에 의한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대립은 점차 격화됐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병하자 일본정부 역시 군대를 파견하면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청일강화조약으로 청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고, 배상금을 지불받았다. 이 중 요동반도는 러시아를 비롯한 삼국의 간섭으로 청국에 반환하게 되어, 일본 국내에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국가주의가 고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가세입의 약 3배정도였던 배상금 덕분에 일본정부는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군사공업과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 후 중국, 조선시장이 개척되어 방적업과 직물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미국수출을 중심으로 한 제사업이 발달하여, 1900년경가지 방적업, 제사업 등 경공업 부문에서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미국, 영국의 승인 하에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 내정, 군사의 실권을 게속 빼앗아 갔다. 급기야 조선통감 이토오 히로부미 암살사건을 계기로 1910년 한국을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두고 식민지지배를 시작했다. 또한 일본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경영했다.
5-3. 20세기의 일본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는 쌀폭동.파업 등에 의해 민중의 의식이 성장하고 일부 지식인의 자극에 따라 국민대중의 정치참여 요구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메이지 유신이래의 과두정치가 끝나고 정당정치가 시작되는 한편 보통선거가 실시되어 민주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를 다이쇼민주정이라 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사상통제, 외부적으로는 한국합병 이후의 무단정치와 같이 명백한 한계를 지닌 제한된 민주정이었다. 그리하여 경직된 독재체제로 나갈 여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일본에서는 우익세력과 군부가 전면에 등장한다. 또한 만주침략을 게기로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되어 파시즘적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이어서 일본은 중일전쟁을 통하여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국제적 고립이 더욱 심해지고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연합국에 패배함으로써 군국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미군정 아래 외부로부터 주어진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경제적으로도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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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15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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