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아미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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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아미타신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불교 대중화와 阿彌陀信仰의 受容

Ⅲ. 阿彌陀信仰 盛行의 背景

Ⅳ. 阿彌陀信仰 事例 分析
1. 欣求淨土에 의한 沙門의 往生
(1) 廣德․嚴莊의 往生과 願往生歌
(2) 白月山의 彌陀成佛 說話
(3) 布川山 五比丘의 西方往生
(4) 念佛師 이야기
(5) 僧兪의 淨土感應 說話
2. 欣求淨土에 의한 婢女의 往生
(1) 郁面婢의 念佛西昇
3. 追善에 의한 死者往生
(1) 仁容寺 彌陀道場의 緣起說話
(2) 甘山寺 阿彌陀佛造像記
(3) 鍪藏寺의 阿彌陀像造成 說話
(4) 月明師의 祭亡妹歌

Ⅴ. 新羅 阿彌陀信仰의 特質

Ⅵ. 新羅 中代 阿彌陀信仰의 性格
1. 中代 王權 强化와 阿彌陀信仰
2. 景德王代의 阿彌陀信仰

Ⅶ. 맺음말

본문내용

여 聖 靈禪院의 伽藍과 삼층 석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즉 죽은 사람의 왕생과 살아있는 국왕의 장수 및 위엄, 왕비와 왕족의 복락을 함께 기원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에서 성덕왕으로 이어지는 중대 왕실은 적극적으로 아미타신앙을 수용하여 있었다고 보이며, 이것은 불국토사상과 연결되어 아미타불의 위광을 빌어 국왕을 상징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에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특히 國人에 의해 추앙된 성덕왕으로서는 자신의 지위확립이 더욱 절실하였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대 왕실의 민생안정정책은 아미타불의 중생구제의 誓願과도 잘 결부되었으므로 중대 왕실에서도 아미타신앙을 적극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 景德王代의 阿彌陀信仰
경덕왕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경덕왕은 제도의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을 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신라 땅은 불국토라는 관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경덕왕 10년(751) 불국사와 석불사 그리고 南白月寺의 창건이다. 경덕왕은 불국토의 현실화를 통한 왕권강화를 위해 아미타신앙을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다. 아미타신앙은 경덕왕대 행해진 두 차례의 염불만일회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반 민중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왕실에서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하던 아미타신앙은 국민들의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극락정토의 실현을 꿈꾸는 국왕과 민중을 연결시키는 매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경덕왕도 성덕왕과 같이 아미타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성덕왕대의 불국토사상은 아미타불을 비롯한 제불보살이 현재 신라에 상주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미륵신앙이 배제되었던 것과는 비교된다. 따라서 경덕왕대의 불국토사상이 성덕왕대를 회고하는 입장이었으며, 경덕왕대 말기 새롭게 진골귀족과 관련된 미륵신앙이 대두했다는 점은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미타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했던 중대 전제왕권이 실추되어 갔음을 상징한다고 본다.
Ⅶ. 맺음말
이상으로 본 논문에서는 통일 전후의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그 전개과정 그리고 특징과 성격을 신앙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적 불교로서 형성발전한 신라불교는 그 수용면에 있어서 귀족층과 서민층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대중불교가들의 교화에 의해 드디어 서민들 사이에도 불교가 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신라의 미타정토신앙도 서민들 사이에 급히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상의 전개상에서 자연적인 것이며, 新羅史에 있어서 현저하게 나타난 불교신앙의 하나의 발전적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형성된 신라정토교는 전체적으로는 중국정토교의 발전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지만, 몇가지 점에서 다른 특징적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앙면에 있어서 女人이나 賤人까지도 現身 그대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설화가 만들어졌으며, 또한 이것을 증명하듯이 원효의 정토사상 가운데 여인이나 천인의 성불을 인정하는 설이 주장된 것은 특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신라 중대 아미타신앙이 지니는 역사적 성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미타신앙은 국왕으로부터 노비에 이르는 모든 계층에 보급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민의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지나치게 계층간의 대립 측면에서 아미타신앙을 분석가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둘째, 신라 중대의 정토사상 및 아미타신앙은 厭世的 성격보다는 현실긍정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미타신앙의 본질은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세적 경향이 강하며,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인 말법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아미타신앙 사례에서는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도 하지만, 현실에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점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셋째, 극락세계의 현실화에 대한 소망은 성덕왕대에는 오대산에 아미타불을 비롯한 제불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경덕왕대에는 아미타불이 신라에서 성불하였다고 믿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통일에 따른 민족적 자신감과 일체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덕왕대의 믿음이 현재적인 것이라면, 경덕왕대의 불국토사상은 懷古的이라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두 시대의 정치`사회적 환경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즉 중대 전제왕권의 절정기였던 성덕왕대는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경덕왕이 성덕왕의 치세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점과도 관련하여 아미타신앙의 성격변화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넷째, 이와 같은 불국토를 다스리는 국왕은 아미타불의 위광을 빌려 왕권강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열계 중대왕실이 추진했던 민생안정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은 유학의 민본이념과 함께, 아미타불의 중생구제라는 48원을 바탕으로 한 아미타신앙과도 잘 결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열계왕실을 뒷받침했던 일반민중이 아미타신앙의 평등성을 근거로 아미타신앙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던 점과 관련하여, 국왕과 민중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이것은 중고기의 미륵신앙이 귀족과 국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과 비교된다.
다섯째, 극락정토와 도솔천에의 往生難易 논쟁을 통해 우위를 지켜오던 아미타신앙은 경덕왕대 후반기에 오면, 남월사의 창사연기설화와 진표 등에 의해 상징되는 미륵신앙에 의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대에 들어서면 불교의 또 다른 실천행인 禪의 보급과 함께 선종 속으로 융합되어 갔다.
그러나 경덕왕대 후반기 미륵신앙의 대두와 아미타신앙의 성격 변화와의 관계, 그리고 하대의 아미타신앙에 대한 문제는 계속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李基白, 『新羅思想史硏究』,一潮閣, 1986.
金英美, 『新羅佛敎思想史硏究』, 民族史, 1994.
安啓賢, 『韓國佛敎思想史硏究』, 東國大學校 出版部, 1983.
목정배, 『한국불교학의 현대적 모색』,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0.
장휘옥, 『정토불교의 세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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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01
  • 저작시기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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