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로 보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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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면서

2. 신조란?

3. 초대 교회의 신조

4. 나가면서

본문내용

과 더불어 이단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주문은 마가복은 16:16절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에 근거를 두고 있다.
) 필립 샤프, op.cit. p.39.
(6) 제6차 에큐메니칼 공회의 신앙선언(681년)
451년 칼케돈 공회에서 결론을 얻은 기독론 논쟁은 대체로 종식되어 갔으나 다만 알렉산드리아 학파 측에서 불만을 표시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에큐메니칼 공회를 소집하여 칼케돈의 정의를 알렉산드리아 학파 측이 납득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선언문을 채택하였었다.
) 이장식, op.cit. p.21.
그런데 이 때 다른 한 이론, 즉 일의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유티키스이 단성론을 암시할 만한 이론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제6차 에큐메니칼 공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여 칼케돈 기독론 정의를 재확인하게 되었으며 단의론을 정죄하고 그리스도는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결정하였다. 일의론은 단성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온당한 교리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박용규, op.cit. p.400-401.
제6차 에큐메니칼 공회의 신앙선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자연스러운 의향 혹은 의지와 또 두 자연스러운 의지 작용이 있으나 교부들의 교훈대로 서로 분리되거나 변화되거나 분열되거나 혼동됨이 없음을 선포한다.
또 두 자연스러운 의지가 어떤 불경한 이단자들이 말하듯이 서로 받대되지 않고 오직 그의 인간의 의지가 그의 신적인 전능한 의지에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순종한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아다나시우스의 말대로 육신의 의지는(자연적으로) 움직이지만 신적인 의지에 따르는 것이 온당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그의 육신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육신이라고 불리워지며 또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그의 육신의 자연적인 의지도 또한 하나님 곧 말씀 자신의 뜻이라고 불리워지고 또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니 그가 친히 말씀하신대로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고 다만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시고 육신의 뜻을 자기 자신의 뜻이라고 부르시고 또한 그와 같이 그 육신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되었다.
또한 그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혼을 가진 육신이 비록 신화되기는 하였지만 파괴되지 않고 그 육신 자체의 법과 원리대로 남아 있었고,
또 그와 같이 그의 인간의지도 신화하였지만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보존되었다.
우리는 또한 동일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참 하나님에게 두 자연스러운 의지작용이 서로 분리되거나 변화되거나 분열되거나 혼동됨이 없이 즉 신적 의지작용과 인간적 의지작용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설교자 리오가 가장 분명하게 말한대로 "각각의 의지가 서로 교통하는 가운데 각자가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피조물인 육신이 단일한 자연적인 의지작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피조물을 신성으로 승화시키거나 아니면 신성을 피조물의 위치로 끌어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혼동되거나 나눠지지 않는 의지작용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간략하게 전체 고백을 발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참된 하나님을 믿으며, 그는 육신을 입으신 후에도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며, 그의 신인 두 본성이 그의 한 인격 안에서 빛나며, 또 그의 지상의 생애를 통하여 기적을 행하시고 또 고난도 받으셨으니 환영이 아니고 실제였으며, 그의 동일한 인격체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각각 자기 본성에 합당하게 뜻을 품고 일을 하되 서로서로 교통하면서 하는 사실을 보아서 양성의 차이가 인정된다.
이러한 원리에서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서로 연합하는 두 자연스러운 의지와 의지작용을 찬양하는 바이다.
4. 나가면서
비록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편집을 하면서 행한 연구이지만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사도신경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자료를 통해 볼 때 역사상 신조가 없는 교회는 없었다. 그리고 이 신조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 교회 속에서 자라고 발전해 왔다. 따라서 지난날의 신조들을 살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지금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도신경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면에서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의식이나 절차에 따라 사도신경을 반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다. 물론 사도신경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이단에 이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의 의미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식으로 속도 경쟁하듯 예배시간에 외우는 것 또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많은 사상들이 혼란스럽게 난무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의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성경을 자기에게 합당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오히려 성경으로 기독교를 논박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 고백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쓰러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단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인도하는 지도자로써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바른 기독교 신앙고백을 하며 신앙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다.
<참고문헌>
박해경, 신학의 두기둥 성경과 신조(1991), 아가페문화사
박일민, 개혁교회의 신조(1998), 성광문화사
박용규, 초대교회사(1994), 총신대학교출판부
필립 샤프, 신조학(1984), 기독교문서선교회
이장식, 기독교신조사(1990), 컨콜디아사
프란시스 영, 초대 기독교 신조 형성사(1994), 컨콜디아사
http://www.blog.naver.com/mokpojsk
http://ejm11.cafe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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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02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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