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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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2. 쿠바 미사일 위기
가. 위기의 발생
나. 위기의 원인

3. 쿠바 미사일 위기 관리
가. 츠루시초프의 동기, 목적과 전략
나. 켄디의 동기, 목적과 전략
다. 미,소 협상 전략
라. 위기의 순간
마. 승자와 패자

4. 결론

본문내용

보존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쿠바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겼는가? 우리는 쿠바로 미사일을 실어 보냈다가 다시 가져오면서 왕복 비용밖에 들지 않았다.’
또한 흐루시초프는 위기 전에 쿠바에 대한 미국의 공격 가망이 어떠했건 간에, 그 후로는 결코 중대한 공격은 없었다. 파괴 공작과 암살 계획이 1963년 거의 내내 계속되었지만, 케네디는 자신이 암살달할 때까지 카스트로와 잠정협정을 맺기 위한 방안을 조용히 탐구하고 있었다. Khrushchev Remembers: the Glasnost Tapes, p. 180.
소련도 쿠바에서의 “치욕 쿠바 미사일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미국의 감시 아래 그들의 무기들을 철수시켜야 했던 치욕에 아직도 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기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대응 방식이 2년 뒤 동료들이 그를 실각시킨 주된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의 이유는 되었다.
”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만큼 고통받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자신들의 비군사적 능력보다 군사적 능력을 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다. 양측은 소련이 여전히 충분히 싸움을 펼칠 수 있는 한 가지 영역 내에서 경쟁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결국 불안정한 “장기 평화”가 도래하게 된다.
제 4 장 결 론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 당사국간에 정치적 외교를 통하여 정치적 해결을 본 사건으로서, 소련은 쿠바의 보호라는 명분적 이익과 터키의 주키터 미사일의 철수를 미국은 쿠바에서의 소련기지철수라는 실익을 각각 나누어 갖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실을 미국의 정치적 외교의 승리라고 단정할 수 있겠으나, 소련은 자국의 고유한 것을 뺏긴 것이 아닌 단지 얻으려는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본 위기의 결과는 어느 측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경험했던 양 당사국의 지도자들이 1963년 9월 1일 백악관과 크레믈린을 연결하는 핫라인을 개설하였으며, 이전까지 미소 대립의 관계는 본 사건이후 미소접근의 관계로 발전되었다. 1953년 소련의 수폭실험의 성공과 1957년의 대륙간탄도탄의 성공 및 스푸트니크의 성공 등으로 힘에 의한 투쟁이 하나의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게 되었을 때 본 미사일위기는 국제정치체계의 다극화를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첫째, 소련은 쿠바위기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략군사력의 증강에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핵 운반 수단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게 된 1972년에 이르러서 양극체제는 다극체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둘째는 평화공존이 미소간 현실로써 인식되게 됨으로써 동서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원칙이 되었는바, 이것 역시 국제체제의 다극화의 원인이 되었다. 즉 미소의 양 강대국은 전면전쟁의 회피와 평화공존노선의 원칙 하에서 문제를 해결하여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두 진영 내부에서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전면전쟁을 회피하려는 양당사국의 결의는 여타의 나라들이 각각 미소에 의존하는 것을 약화시켰으며, 결국 각 진영의 결합요소로 작용해온 힘과 이데올로기는 제2차대전 직후의 냉전체제에서와 같은 의미와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극화 현상은 쿠바위기 이후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피그만 사건
1961년 4월17일에 쿠바의 망명객 1,500명이 미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아서 쿠바의 남쪽 해안에 있는 피그만에 상륙하였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망명객들은 쿠바인들이 카스트로에 반대하여 궐기하면서 그들을 환영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란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48시간 동안 계속되었었는데 첫날 침입자들은 쿠바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둘째 날은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후퇴하였고, 카스트로의 공군이 무기 적재함을 침몰시켰기 때문에 탄약 보급은 떨어져갔다. 망명객들은 단지 니카라구아에 본부를 두었던 취약한 비행단의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정규 공군의 지원사격이 없이는 침입자들의 비행기가 어디에라도 상륙하여 그들을 재 보급시킬 수 없었다.
이 계획은 아이젠하워 때 세워졌으나 케네디가 그것을 미국 군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승인하였던 것이다. “케네디는 이 계획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군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수차례 밝혔었다.…그러나 CIA와 쿠바 망명객들은 아마도 때가 오면 케네디가 별수없이 미군을 파병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었다"고 역사가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는 술회하였다. 결국 그러한 기대는 허사로 돌아갔으며, 침입 이틀 후 탄약 부족으로 114명이 사망하였고, 그 나머지 망명여단은 쿠바군에 항복하였다.
아바나 회의에 참석하였던 듀란(Alfredo Duran)은 - 쿠바인들이 그들을 미국에게 이용된 용병으로 여기지만 -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해악으로부터 수호하려는 쿠바의 애국자들이었다. 우리는 쿠바의 미래를 바라보고 쿠바 국민과 공화국에 가장 유익한 미래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그는 피력하였다.
스푸트니크
러시아어로 ‘동반자’라는 뜻이다. 스푸트니크 1호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1957년 10월 4일 발사되어, 이듬해 1월 4일 소멸하였다. 근지점(近地點)은 228km, 원지점 947km, 주기 96.2분, 적도경사 65.2 °, 무게는 83.6kg이었다. 금속구(金屬球)에 4개의 안테나가 달린 모양이었으며, 내부에는 측정기와 2대의 송신기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1957년 11월 3일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되어 이듬해 1월 14일 소멸되었으며, 무게는 508.3kg으로, 개 1마리와 우주선 ·자외선 측정장치를 적재하였다. 또, 스푸트니크 3호는 1958년 5월 15일 발사되어 1960년 4월 6일 소멸되었는데, 무게는 1,327kg으로 처음으로 1t을 초과하였다. 여기에는 대기조성 ·자기장(磁氣場) ·태양복사를 측정하는 기기 등 968kg을 적재하였다.
몽구스 작전
미국은 몽구스 작전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공작들을 통해 쿠바가 제3세게 국가들의 모범적인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모델이 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경제봉쇄 정책과 카스트로 암살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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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15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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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7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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