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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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경복궁 바로 너야!

2. 만남과 첫인상
1) 해치의 존재 이유
2) 시련의 역사, 광화문 습격 사건
3) 안흥사 오층석탑과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3.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1) 흥례문과 근정문
2) 주변을 둘러싼 의문들
3) 근정전의 내부를 둘러보다

4. 수정전을 돌아 사정전까지
1) 수정전
2) 경회루
3) 사정전

5. 강녕전에서 자경전까지
1) 강녕전과 교태전
2) 자경전

6. 답사를 마치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은 신격이고 신을 뜻하는 동물이 용이다. 왕이 항상 머무시는 곳에 용마루를 두면 왕 위에 또 왕이 있는 셈이요, 절대군주는 절대 둘일 수 없으니 격이 맞지 않는다 해서 강녕전에는 용마루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에도 역시 용마루는 없다.
강녕전과 교태전을 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부부가 따로 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로 잔다는 것은 부부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조선 시대에는 부부가 지내는 공간이 달랐다. 부인이 지내는 곳을 안채라고 하고 남편이 책을 보고 친구를 만나는 곳을 사랑채라고 하였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편 친구를 안채까지 맞이하여 대접하는 법은 없었다. 물론 남편은 안채에 와서 잘 수 있지만 날마다 같은 방에서 지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유교적 생활 방식을 따르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깊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강녕전이 사랑채라면 교태전은 안채인 것이다.
왕비 처소 뒤뜰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미산과 굴뚝이 있는데 지금은 공사 중이라 전부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왕의 처소라면 먼 가 특별한 게 있을까 싶어 마루에 살포시 앉아 보았다. 해가 져갈 때쯤이라 매우 쌀쌀하고 추웠건만 왜 강녕전만큼은 이렇게도 따뜻한 것일까? 다른 곳에서 불던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2) 자경전
자경전은 대비의 처소다. 한눈에 보아도 매우 크고 화려함을 알 수 있으며, 굴뚝 하나만을 단순비교해 보아도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위엄 있어 보인다. 궁궐 뒷방 노인네라고까지 불려 졌던 대비의 처소는 왕비의 처소보다 작은 게 통상 당연한 것인데, 경복궁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왜일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할 때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이 당시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간략히 정리하면, 철종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었다. 지긋지긋했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벗어나려 한 조대비가 파격적으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도록 하니 이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의 즉위, 이제 세상이 바뀐다. 12살, 어린 고종을 대신해 통치하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심이 된다. 한 손에 대권을 거머쥔 흥선대원군에게는 조대비가 평생의 은인이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담은 것은 아닐까.
이런 은혜의 흔적은 보물 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뒤울의 십장생 무늬 굴뚝에서도 나타난다. 자경전을 둘러보고 건물 뒤쪽으로 가면 화려하면서도 아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담벽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담벽인 것 같지만 좀 더 다가가 보면 아주 예쁘게 생긴 굴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동물, 식물, 또 알 수 없는 무늬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이 굴뚝은 단순한 난방 장치가 아니다. 뛰어난 조각품이요, 멋들어진 그림이며, 주인의 품격을 드높여주는 화려한 장신인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이처럼 난방을 해내는 멋들어진 굴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경정은 정말 볼 것이 많다.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으나 십장생 굴뚝을 보고 나오면서 십장생 무늬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단순, 소박해 보이면서도 온갖 화려하게 치장한 듯한 담벼락을 볼 수 있다. 담벼락 한 면을 따라 연이어 있는 꽃 모양의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의 판화와 비슷한 원리라 할까? 분명 만져봐서는 평평한 면인데 그림마다 색이 다르다. 이는 본바탕의 담에 날카로운 무엇인가로 그림을 그린 후 그 안에 바탕과 다른 색을 넣어 만든 기법인 듯 보였다. 누구나 하찮게 여길 법한 담에 그 누가 이렇게 아름답고도 정성스럽게 치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런지 보물급인 십장생 굴뚝보다 쉽사리 지나칠 법한 꽃담에 눈길이 배로 갔던 게 사실이다.
6. 경복궁 답사를 마치며...
이번 답사 보고서를 쓰면서 교수님께서 지적했듯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을 탈피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나만의 시각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한 증거로 이 보고서엔 내 궁금증을 대신한 물음들이 많다. 물론 그 물음에 답을 못한 부분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만의 시각을 찾기엔 경복궁이란 어느 한정적인 공간에서의 궁금증은 한계가 있었으며 그러한 궁금증 대부분들은 여러 책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들이여서 천편일륜적인 보고서가 되지 않았나 걱정도 되지만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아무도 안 갔을 법한 곳'을 선택한게 아니라 '누구나 갔을 법한 곳'을 선택한 것이기에 내가 이루려했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만족한다.
조선 제일의 궁. 경복궁은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게 한다.
먼저 가족들 단위의 방문객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가족뿐만이 아니라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로도 최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실상 나도 여자친구와 카메라를 들고 경복궁을 견학하면서 시끄럽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경복궁은 색다르고 신선한 데이트 코스였던 것이다.
또한 경복궁은 나에게 생각의 전환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문화재, 역사지라고 하면 십중팔구 거부감을 나타낸다. 나또한 그중 한 사람 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5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문화재라는 곳을 내가 먼저 직접 찾아가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이다. 물론 교수님 말씀처럼 내가 갔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지나쳤을 것이다. 문화재 불감증이라고 생각되는 무관심으로 인해 분명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번 경복궁 답사를 통해서 얻은 것 하나가 이것이다. 쉽사리 지나쳤던 곳을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다시 바라보게 된 점이다.
이번 답사 보고서를 쓰면서 배우고 느낀 점이 많다. 하지만 내가 찍었던 사진을 이 보고서에 실지 못했다는 점과 경복궁 곳곳을 모두 다루지 못했다는 점 반성한다.
참고문헌
『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기록문화학회지음, (실천문학사, 1997, 서울)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성세정, (영진닷컴, 2003, 서울)
『이야기가 있는 경복궁 나들이』, 강경선 외 4명, (역사넷, 2000, 서울)
『우리문화 우리 역사 답사기』, 신영훈, (대한교과서, 1998,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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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0.31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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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1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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