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의 사회운동-반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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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이후의 사회운동-반탁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A.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1) 제 2차 세계대전과 해방
(2) 해방정국과 건준의 활동
(3)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과 좌절
B. 신탁통치논쟁과 좌우대립
(1) 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
(2) 우익세력의 통일전선
(3) 좌익세력의 통일전선
(4) 좌우의 갈등
1. 좌익세력과 찬탁논리
2. 우익세력과 반탁논리
3. 좌우익세력의 대립과 갈등
(5) 탁치문제에 관한 논쟁
(6) 신탁통치문제이후의 정국
C. 좌우합작
(1)좌우합작의 개념
(2)좌우합작의 배경
D. 미․ 소의 대립과 민족국가건설의 좌절

Ⅲ. 결 론

본문내용

주장하였다. 미국측의 이런 태도변화의 결정적인 이유는 전세계에 걸친 미소대립과 관련하여, 7월에 드러와 미국의 대소강경책이 더욱 뚜렷해진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당시 미소협조의 유일한 지역은 한국이었는데, 7월쯤에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은 미해결된 국제문제에 대해서 미소간에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는데 힘을 낭비할 필요없이 미국이 우위를 차지한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하려고 힘써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제 소련과 타협하여 한반도 전역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려던 국무성 등 미국의 대소 유화파들의 노력은 파탄에 이르렀고, 한반도에 미군이 상륙하면서부터 군부 등 미국의 대소 강경론자들이 구상하고 실천하였던 바대로, 미국은 38선을 미국의 세계체제의 극동방위선으로 고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의 분단은, 한국인의 좌우대립이나, 한국인의 통합의지와는 상관없이,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승만 한민당의 단정노선과도 상관없이 현실화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무장관 대리 러베트는 8월 28일 소련정부에 전달한 서한에서 미 소 영 중 4대국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를 조속히 실천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기 위해서 9월 8일부터 회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소공위에서 실패한 것이 소련한테 불리한 4대국회의에서 성공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러베트 미국무장관대리의 제안은 다음 조치를 취하기 전에 외교경로를 밟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일종의 절차였다. 『독립신보』 1947. 9. 6
몰로토프 소련외상으로부터 4개국 회의개최반대를 통고받은 마샬 미국무장관은 유엔총회가 개최된 다음날인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의하였고, 소련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총회 상정안은 유엔총회 운영위원회에서 9월 21일에 12대 2로 가결되게 되어 통일자주민족국가의 성립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해방정국의 찬탁운동과 반탁운동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는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이후 우리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서론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발제문은 해방정국에서의 찬탁과 반탁의 비교를 통한 시대개괄이 아니라 반탁운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운동의 배경과 논리 등을 풀어보고자 함이 목적이 었다. 이는 지극히 의도된 서술의 목적지향성을 의미하며 우리는 반탁의 논리와 배경 등의 고찰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하에서 친일 또는 부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세력이 8 15 해방을 전후하여 반공 반소를 표방하면서 애국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 모순적 우리 역사의 운명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매국과 애국”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던 갈등양상은 세계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특수성을 기화로 “반탁과 찬탁”의 갈등양상으로 전환되면서, 일제 치하에서 친일 세력들이 감행했던 수많은 반민족적 행위들을 반탁운동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으로 덮어씌우고 애국자임을 자처했던 역사적 모순구조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많은 논문과 책을 읽었지만 이런 반탁운동 세력의 논리를 속 시원히 언급하는 저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부분이 반탁과 찬탁운동의 대립구조를 통해 시대상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반탁운동세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을 호도하면서 까지 반탁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아간 저의를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본 발제문에서는 학우 여러분들이 주지하고 있는 위 갈등양상을 재언급함과 동시에 좀더 구체적인 사실을 명확히 하는 수준의 언급을 통해 우리 스스로 반탁운동 세력의 기저에 깔린 논리를 간파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
발제문을 작성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위에서 설명한 연구상의 한계이외에도 탁치논쟁 이후의 정국에 대한 언급이 더 이루어지지 못함이다. 주요 정치세력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자신들이 그리는 국가― 그것이 민족국가건설이든, 국가 건설이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는 지에 대한 서술을 좀 더 하고 싶었으나 시간 상의 제약으로 그러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끝을 맺자면 해방정국에서의 左와 右 는 분명 일제 치하에서 우리가 설정해왔던 좌와 우와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었고, 일제 치하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좌와 우가 바뀌어 존재하는 양태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탁치논쟁에 휩싸여 시급한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과거의 청산을 끝내지 못하고, 친일 세력을 또 다시 친미 세력으로 환치시켜 우리 현대사에서 우익이라고 일컬어지는 지배 계층으로 복원시킨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이다.
남한에서의 대결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은 좌우익의 정치세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을 허위 보도한 언론에 있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당시 언론사를 통제하고 있던 미군정과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언론사만의 잘못을 지적함은 옳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언론사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은 주지하다시피 일제에 어느 정도는 동조하는 세력들이었고, 이들이 교묘한 매스컴플레이를 통해 해방정국에서 그들의 열위적 입지를 만회하고, 한순간에 우위적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고도의 정치극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 같다.
정리하면서 읽어보니 결론이 과격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한 학기의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발제자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싣고자 한다.
■ 참고 문헌 목록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김행선, 《해방정국청년운동사》, 선인, 200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오름, 1998
안종철, 「광복 전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한국사》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2002
박현채 엮음,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소나무, 1992
서중석, 「좌우합작과 남북협상」(『한국사 시민강좌』12 )
이정식, 「인민공화국과 해방정국」 (『한국사 시민강좌』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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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9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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