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소쇄원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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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담양소쇄원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소쇄원 개요

2.조영자와 후손

3. 소쇄원 건축

4. 소쇄원의 전경

본문내용

, 혹은 이보다 앞선 시기라고 할 것이다.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소쇄원48영」의 주요한 시점의 하나로 여기에서면 소쇄원의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 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 37영 ‘동대하음’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 「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 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중국에는 봉황새가 모여 살았다는 봉황새와 봉황산이 많다.
- 담장 밖 소쇄원 -
「소쇄원도」에는 담장 안뿐만 아니라 밖에도 여러 시설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이 소쇄원의 직접적인 구성요소들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관계가 있었음을 분명할 것이다. 흔히 소쇄원의 영역을 담장 안으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넓은 범위까지 확대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차제에 담장 밖에 있는 부분들을 정리해 본다.
고암동 (岩洞)
양자정의 호인 고암岩을 따 부른 마을 이름이나 동굴 혹은 골짜기 이름이다.
소쇄원에서 약간 오르는 뒷산을 고산山 혹은 장원봉 이라고 부르는데, 이 산중턱에 있는 큰 바위 이름이 고암이고 이 고산에 동굴이 있다. 고암동을 마을로 보아야 할지 동굴이나 골짜기로 보아야 할지 의문이다.
황금정 (黃金亭)
논 가운데 지어놓은 정자로서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을 엿볼 수 있다. 그 옛터는 현재 논이다. 소쇄원이 시작되었을 당시의 시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구전에 의하면 소쇄원 동굴 밖 약 50m에 있던 우물 (황금정 黃金井) 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황금정에 딸린 우물이었다는 이곳은 최근까지 존재했었다.
죽림재 (竹林齋)
「소쇄원도」 에는 애양단을 감싸고 있는 담장의 외곡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 산등성이를 돌아가는 곳에 위치하고 팔작지붕 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변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구전에 의하면 소쇄원 뒷산의 동북방향 500여 미터 지점에 건물터가 있었는데, 이를 죽림재 터라고 한다. 후손들은 이 죽림재가 있었던 골짜기를 ‘서당골’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임회가 쓴 고암공 묘지 중에 ‘죽림서당’이라는 표기가 있다.
행정 (杏亭)
창암촌 마을의 살구나무 아래 지어놓은 정자이다.
「소쇄원도」에는 소쇄원의 입구에 정자명만 기록되어 있어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다.
구전되는 살구 정 터 는 현재 논이다. 창원 당시의 시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문화재관리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행정은 정자 모습이 아니고 위교 서암에 서있던 은행나무 두 그루의 녹음을 운치 있게 행정이라고 이름 지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소쇄원사실」에는 은행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창암촌 (蒼岩忖)
창암촌 (일명 지석동支石洞) 은 소쇄공의 본가가 있었던 마을이다.
창암은 양산보의 선친, 양사원의 호에서 따왔다. 양사원은 처음 광주 창교 에서 창평의 지석동으로 이주하여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창암촌과 지석은 가까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마을로 구분된다. 창암촌에 양산보의 본가가 있었다면 소쇄원과 직선거리는 약 2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절등재 (絶等齋)
「소쇄원도」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소쇄원도」의 좌측에 글자로 기록되어 있고 김창흡의 『삼연집三淵集』에 기록되어 있으며 근래에 제작된 「소쇄원도」의 모사본에 절 등재라는 글씨가 써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절 등 이라는 말은 매우 뛰어남을 의미한다.
절 등재는 일종의 교육공간이다.
<소쇄원의 전경>
양쪽 옆으로 우거진 대나무 숲이 색다른 풍치를 이루는 소쇄원 입구.
소쇄원 입구 맞담 왼편으로 대봉대가 보이고, 오른편에 지석마을이 있다.
소쇄원 계곡 위에 걸린 외나무다리. 조선시대 원림의 대표적인 소쇄원의
광풍각(앞쪽)과 제월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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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1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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