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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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비평]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영화소개

2. 감독 소개

3. 영화 줄거리

4. 영화 분석

1) 영화 분석의 핵심 개념
(1) 여성주의 영화
(2) 에코페미니즘

2) 각 인물을 통해 분석해 본 Antonia󰡑s Line
1. 안토니아
2. 다니엘라
3. 테레사
4. 디디
5. 크룩핑거
6. 레타

5. 영화 감상평

본문내용

을 목격한 다니엘라는 농기구로 그의 손을 다치게 하고, 그를 마을에서 떠나게 한다. 아버지인 댄이 죽은 후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15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피터는 다니엘라에 대한 복수로 테레사를 강간하는데, 그 대가로 안토니아는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경고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청년들에 의해 피터는 폭행을 당하고, 결국은 동생인 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신부의 성추행 역시 안토니아와 바즈의 발견과 협박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렇게 영화에서 강간 혹은 성추행에 대한 대응방식은 법이나 다른 사회적 방법보다는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따른 자력구제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처벌의 형태를 통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법이 여성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결코 온당하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강간을 당한 이후에도 디디와 테레사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보살핌과 더불어 직접적인 방식이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안토니아 집 마당의 상징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집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달리 갈 곳이 없는 상처받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에는 죽은 자들마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안토니아의 마당이다. 그녀의 집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그녀의 성별을 떠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덕 때문이다. 그녀가 갈 곳 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집은 항상 붐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야 할 모습이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는 소리를 듣는 까닭은 주인공 안토니아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여성을 억압하고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모두 감상하고 나서 안토니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종합하여 표현해 보자면 그녀는 그야말로 '당당한 여성'의 상징이었다. '당당하다'라는 표현이 우리가 머릿속에서 단정짓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게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근접한 단어를 찾아보자면 '당당하다'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하다. 그녀는 당시 시골에서의 일반화되어 있던 여성의 모습이 아닌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배워갔던 딸 다니엘라도 엄마의 모습과 그리 다른 모습이 아니다. 그녀들이 모티브로 잡고 있는 것은 남성들에게서 휘둘려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눈치를 신경 쓰기보다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돌아볼 줄 아는 여유로움도 갖추고 있다. 안토니아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교감을 그저 남성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여, 쾌락만을 위한 관계로 단정지어져 가고 있는 더러운 환경들을 강력히 일단락 시키고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를 좀더 승화시키며 이것은 결코 간단하게 생각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영화에서 다니엘라는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모르는 남자와 성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온다. 단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아이 아빠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무척 의아스러웠고, 결국 그녀들이 선택한 남자와 함께 아이를 갖기 위한 과정에 들어가는 장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했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내용과는 약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들이지만 이 장면을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관계가 위대한 탄생을 접목시켜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와 같은 관계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의 표현이라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주인공 안토니아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해 준다. 그녀는 여성들을 굳이 끌어 모아 집단을 만들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를 당당히 주장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한다면 그것 또한 억지라 생각되고 오히려 역반응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도 든다. 안토니아가 주장하는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미적미적 거리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된 무엇인가를 끝까지 주장해 나갈 수 있는 끈기와, 그것을 확실히 보여 주려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이는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이 끝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죽음. 그러나 영화에서 죽음만이 공포가 아니다. 바로 인간 자체가 공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그 해방자도 바로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탄생이라는 대치적인 상황으로서가 아니라 삶 전체에 깊은 고뇌를 반드시 이겨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극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인간사의 한 귀퉁이에 있어야 하는 그 어떤 고통의 형상이나, 공포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세계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도리어 영화에서 보듯 인간 자체가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방자도 인간이다. 인간만이 삶을 이겨내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인간적인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죽은 사람들이 밝은 모습으로 안토니아의 식탁에 나타난다. 그리고 안토니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동이 터 오는 시간에 임종을 맞이한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안토니아가 죽는다고 그 사회의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토니아는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고 안토니아가 죽은 후에도 바뀐 마을은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가 부디 영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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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05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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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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