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의 일본유학시기 종교문제 탐구와 민족주의 및 세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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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1. 항일자주의식의 형성
2. 중국망명과 초기독립운동

Ⅱ. 일본유학시기의 종교문제 탐구
1. 유학 초기의 종교관
2. 1910년 기독교 입교와 종교관의 변화

Ⅲ. 일신교 시기의 육성교
1. 일신교 개창
2. 일신교의 교리 체계

Ⅳ. 대동종교 시기의 육성교
1. 대동종교의 체제와 내용
2. 일신교와 대동종교의 비교

Ⅴ. 한살임과 육성교
1. 한살임의 결성
2. 한살임의 내용
3. 한살임과 육성교

Ⅵ. 맺 음 말

본문내용

다. 이 중 무사부의 일을 살펴보면, 군사와 전략 문제 뿐만 아니라 전쟁, 암살, 파괴, 습격, 약탈, 정탐, 파업 등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독립운동의 방법으로서 투쟁적인 방법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원은 입당 후 1개월 내에 12원을 납부하도록 했으며, 입당시에는 당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가결되어야만 가입이 허용되는 것으로 하였다. 당원의 권리와 의무 중 특이한 것은 '세계 혁명의 권리'와 '破舊建新의 권리'가 있다고 했으며, '비밀을 엄수할 의무'와 '군사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이 강조되었다.
) 위와 같음.
3. 한살임과 육성교
韓薩任은 강령, 조직, 그리고 목표를 볼 때, 이전의 육성교라는 종교 조직과는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성교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발해경」이라는 용기의 철학을 일종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 「발해경」은 용기의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용기를 모든 일의 성패, 생사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관련된다. 즉 1919년에 작성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살신성인, 희생적 투쟁과도 연결된다. '희생'은 일신교의 실천 강령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가 육성교적 사고에 의거하여 기술되었듯이, 韓薩任의 실천 덕목은 「발해경」과 같은 종교적 덕목에 토대를 두고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에서 독립을 위한 희생적 투쟁을 명령하는 존재가 상제를 받드는 단군대황조이듯이, 세계 한살림을 실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용기'의 철학은 대조영이 계시한 것이다. 韓薩任 강령에도 육성교와 같은 종교적 성격이 확인되는 것이다.
역사신적 존재인 대조영의 계시를 통해 韓薩任의 실천철학이 정립된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22년 시기 조소앙의 사고에는 아직도 종교적 사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22년 3월 1일 발표된 「삼일독립신고」
) 「삼일독립신고」(『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 『자료집』 1, p.813.
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조소앙은 '독립신'에게 고하는 형식의 글을 썼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독립의 신성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궁궁을을', '정진인설', '진인 해도출현설' 등을 언급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그가 독립운동을 민족 혹은 민중적 정서와 전통에 착근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까지 구세주 대망의식이라는 종교적 사유를 지속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육성교는 자신이 바로 眞人이라는 확신에서 구상된 것이다.
韓薩任과 대동종교는 거의 동시기, 특히 1922년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다만 대동종교는 발표되지 않았고, 「韓薩任要領」과 「발해경」만 발표되었다. 韓薩任이 발표된 시기는 1925년 1월 『김상옥전』이라는 이름의 책자로 간행된 시점이다. 저술 시기와 발표 시기가 차이가 있다. 1925년의 시점에서는 이미 육성교적 사고를 탈피했기 때문에 대동종교를 공표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Ⅵ. 맺 음 말
이상에서 일본 유학시기 조소앙의 사상적 모색부터 1925년 韓薩任에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론을 정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 보았다. 이 시기 그의 중심적 사고는 육성교 구상과 그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육성교는 세계의 각 종교 중 대표적인 성인 6인을 선정하여 육성의 가르침을 통합함으로써 인류동포 사상에 의거하여 세계일가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종교였다. 이러한 세계의 문제가 해결될 때, 민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육성교는 민족의 독립과 세계 평화, 과학과 종교, 동양과 서양 등 일체의 차별적 현상을 일원적 원리에 의해 통합하는 것을 통해 해결하려는 사고에서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육성교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시기에 따라 민족적 특수와 세계적 보편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바뀌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15년 단계의 일신교에서는 유일신, 사해동포, 희생, 육성이라는 개념 등 서양의 기독교적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육성교적 사고가 민족의 독립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에 적용되면서 민족적 특수의 비중이 강화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에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국제사회의 도덕과 정의, 그리고 대동평화세계의 건설의 주과제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한민족의 독립 투쟁은 국제사회의 평화 실천이라는 신성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상제의 신성한 명령이 단군대황조를 통해 구체적으로 반영된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서 단군은 일신교에서 여섯 성인 중의 하나에서 구체적 역할을 갖는 존재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1922년경의 '대동종교'에서는 육성의 대상도 변화하며, 육성의 구체적 위상과 역할도 재정립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 등이 빠지고 한민족의 조상 단군 뿐만 아니라 수운 최제우도 육성에 포함되며, 동양의 자연신앙적 전통을 대표하는 노자도 포함된다. 동양의 역사 전통, 민족사적 전통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육성의 통합 원리로서는 동학에서 확인되는 유불선 삼교합일 사상과 주문·비결 등 민중신앙적 요소가 크게 강조되는 것이다. 육성교는 추상적 관념적 수준의 통합종교에서 동양역사 특히 한국사의 역사전통에 기반을 둔 통합종교로 성격이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현실적인 독립투쟁론에서는 민족혁명 우선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韓薩任에 나타난 민족해방론이 그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는 계급이 없고 국가도 소멸된 무계급 평등사회인 세계 한살림을 이상사회로 본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제1단계는 민주독립을 위한 30년의 독립전쟁이다. 제2단계는 계급해방을 위한 50년의 계급전쟁이다. 제3단계는 세계 한살림을 위한 단계로서 아시아로 확대하고 나아가 세계 한살림을 실천하여 無治의 극락세계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문제를 단계론적 방법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민족과 세계의 문제를 단계론적으로 해결하는 삼균주의의 기본적 골격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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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04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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