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사상과 민족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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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사상과 민족통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들어가기

Ⅱ. 본론
1. 단군은 누구인가
2. 단군의 사상과 철학
1)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2) 단군의 의식 개혁론
3. 단군과 한민족 통일
1) 단군을 주체로 한 단일민족으로서의 통일
2)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주체로 통일을 이루자
3) 배달 역사의 필연성으로 통일을 이루자

Ⅲ. 결론
「별첨」“단군을 찾아서”
1. 초지진
2. 마니산
3. 참성단
4. 삼랑성
5. 전등사
6. 광성보
7. 덕진진
8. 강화역사관
9. 고려궁지

※ 그 밖의 단군 관련 유적지

♧ 참고자료

본문내용

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9. 고려궁지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습니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습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입니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 그 밖의 단군 관련 유적지
1. 백두산
옛 문헌에 실린 백두산에 대해 알아보아면 다음과 같다.
1) 삼성기
천신의 명을 받들어 백산, 즉 백두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 오셨다. 자정여정(子井女井)을 천평에 뚫어 파고 정기를 청구에 그었고 천부인을 가지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이치로 다스리시어 되게 하시고 인간을 홍익인간 이화세계 하시었다. 도읍을 신시에 정하고 나라를 배달이라 일컬었다.
2) 사마천 사기(史記)
지금부터 2,100년 전에 동아의 동북녘 땅이 있는 말갈 나라는 옛날 숙신의 나라로서 큰 바다와 닿았었다. 이 나라의 남쪽에 한밝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새 짐승들과 풀 나무들이 모두 희다. 중국 사전에서 말하기를 한밝산에는 나무들이 울창하여 해를 볼 수 없고 해마다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큰 눈이 덮여 있고 산 위에는 흰 구름이 항상 있으므로 산 이름을 장백산이라 한다.
3) 역대통감 사기 후한서 등
아득한 옛날에 신선 활로가 신선 원시를 데리고 동해의 나라 신령스러운 터를 향해 가면서 조선인 숙신 나라에 있는 약수를 지나 봉래 땅에 이르렀다. 봉래산에는 금과 옥으로 꾸민 큰 궁전들이 많고 또 새 짐승들이 모두 희다. 염제 선농의 신하인 신선 적송자가 이르기를 봉래와 방장과 영주는 배달 나라인 발해에 있는 삼신산인데 이 산에는 물건들과 새 짐승들이 모두 희며 금은으로서 궁궐을 지어 둔 까닭에 멀리서 바라보면은 온 산이 바다같이 희다고 하였다.
4) 삼한비기
백두산의 우람한 큰산은 망망하고 넓은 대지 가운데 탄탄하고 평탄하게 자리하고 있어 가로가 천리에 이르며 높이가 2백리로 우뚝 솟아 그 웅장하고 위엄이 하늘을 찌를 듯 하며 높고 낮은 모양이 창자처럼 구불구불 감돌아 보이는 산세는 연연히 구비치는 파도처럼 아름답다. 실로 배달 천궁의 진산(眞山)이다. 신인께서 오르내리심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밖에 단기 고사에는 백두산이 밤새 울며 천지의 물이 창일(漲溢) 했다고 했고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방지 영변여지승람 조선사략 등에 백두산의 기록이 적혀 있다.
2.구월산 (삼성사)
단군께서 백두 천산에 나리셔서 93년 동안 세상 인간을 바로 다스리는 이화세계의 본을 보이시고 사람을 서로 사랑케 하고 유익케 하는 홍익인간의 길을 여신 뒤 경자년 음력 3월 15일에 이르러 문화 구월산에서 한울에 오르시니 뒷날 이 땅에 돌집을 지어 [어천대]라 했다.
단군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지가 217년이요 임금의 자리에 계신지가 93년 동안이시다. 그 후 첫째 아드님 부루(扶婁)태자에게 치화를 맡기시고 한울에 오르셨다. [구월산]하면 두 가지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생각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단군께서 한울에 오르신 거룩한 어천(御天)과 둘째는 그 단군님의 성업을 기리는 삼성사, 즉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3. 평양의 숭령전
평양의 숭령전은 단군 묘로 불렀는데 조선 영조 5년에 [숭령전]이라 칭하고 전참봉 2인을 두었으며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평안도 평양부 성 밖에 있으니 조선 세종 11년에 정전과 동서행랑을 지어서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모시고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냈다.
조선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서 {조선시조(朝鮮始祖) 단군지위(檀君之位)}라 하고 5년 경진년에 황세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거동하여 친히 제사 지냈다. 또한 조선 숙종 5년, 23년에는 가까운 신하들을 보내어 제사 지내고 어제사를 남겼다. 정조 5년에 제사 지냈다.
4. 묘향산 단군굴
묘향산에 단군 굴이 있는데 단군님께서 임금이 되시기 전에 계시던 곳이라 한다. 단군 굴은 큰산 하나를 차지한 바위 속에 높이가 40척이요, 깊이가 35척이요 넓이가 50척이나 되는 거대한 석굴이다. 돌은 아름다운 화강암으로서 초록빛과 흰빛의 무늬가 갖가지로 둘러 있으며 동쪽에 한줄기의 물줄기가 햇빛같이 번쩍이고 있으며 서쪽 그윽한 돌 벼랑위에 정면 남향으로 세 분의 위패가 모시어져 있는데
단군천신지위(檀君天神之位)는 가운데, 오른편에는 환인천왕지위(桓因天王之位), 왼편에는 환웅천왕지위(桓雄天王之位)라고 써서 굴속에 모시어 졌다 한다.
♧ 참고자료
◎ 단군공동체 (http://dangoon.org/t_world.html)
◎ 강화군청 홈페이지 (http://www.ganghwa.incheon.kr/pub/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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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10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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