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가인가 시대의 방탕아인가, 김동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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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김동인의 삶
2. 김동인의 삶에 따른 문학
1) 순수에의 추구와 단편소설 옹호자
2) 잡지소설, 신문소설, 야담
3) 친일의 길
3. 작품 연보
4. 작품과 그 속에 나타난 동인문학의 특징들
1) <약한자의 슬픔>에 나타난 김동인의 신소설
2) <감자> 분석과 인형조종술
3) <광염소나타>와 김동인의 유미주의
5. 김동인과 염상섭
1) 최초의 논쟁 - 김동인과 염상섭
2) 해묵은 싸움 - <발가락이 닮았다>
3) 서울말 평양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비평사에서 최초의 논쟁으로 꼽히는 김동인과 염상섭의 3차에 걸친 싸움의 시작은 1920년 김환의 단편 <자연의 자각>이 발표된 뒤에 일어났다.
창조 동인으로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김환이 유학생지 <현대> 창간호에 발표한 이 소설에 대해 이미 제월이란 이름으로 평단의 일가를 이룬 염상섭이 '자연의 자각을 보고서'에서 혹평을 했다. 염상섭은 비단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비판했을 뿐 아니라, '내가 이전에 무슨 소설을 써서 <학지광>에 기고했는데, 김환이 몰서(沒書)하였기에 그는 얼마나 잘 쓰는 사람인가 했더니 겨우 이꼴이다'고 인신공격까지 가했다.
여기서 비롯되어, 김동인은 '제월씨의 평자적 가치'로 개인적인 감정으로 작품을 비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등 염상섭을 공격했고, 이를 맞받아 염상섭은 '여(余)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 답함', '김군께 한 말'로 응수했고, 김동인은 '제월씨에 대답함', '비평에 대하여'로 공방전을 폈다. 마침내 제삼자인 김찬영의 중재적인 논문 '작품에 대한 평자적 가치'로 일단락된 이 논쟁은, 일반적으로 견원지간처럼 보이는 작가 대 비평가의 흔한 싸움의 전형을 이룬다.
김환의 소설이 허술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김동인은, 그러나 비평에 인격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소설 작법을 알아야 비평할 수 있다는 것, 작가의 의도까지 비평가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 등, 요컨대 비평가는 작가에게 있어 영화의 변사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염상섭은, 작가의 성격 사상 이력 등 인격을 검토하지 않고는 작품을 제대로 비평할 수 없으며, 더구나 비평가는 작가를 지도할 수 있다고 김동인의 '변사론'을 반박했다.
2) 해묵은 싸움-<발가락이 닮았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소설로 전향한 염상섭과 자연주의소설을 개척한 김동인- 한국소설사의 두 거목 사이에 개재한 석연치 않은 감정은 10년 후 또다시 폭발한다. 염상섭의 깊은 원념을 사게 된 이 사건의 포인트는 김동인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였다.
지나친 사창가 왕래로 성병을 앓고 생식 능력을 잃은 M이 결혼, 아내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을 자기 것으로 믿으려는 눈물겨운 희극을 다룬 것인데, 주인공 M이 바로 자기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염상섭이 대노한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듯한 근거가 있었다.
M의 결혼 연령이 염상섭과 같은 32세였다는 점, 구식 혼례를 올렸다는 점, 신혼 초부터 아내를 학대했다는 점, 염상섭이 M처럼 가난하고 술고래였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 발표 얼마 전에 염상섭이 아기를 낳았다는 점 등이 일치하고 있었다.
염상섭은 즉각 김동인에 대한 공격문을 써서 <동광>지에 보냈고, 당시 주간인 주요한이 실어주지 않았지만, 조선일보에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 문단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두 사람의 차디찬 사이는 김안서의 억지 화해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다가 염상섭이 만주 안동에 있을 때 김동인과 만나 회포를 풀면서 약간 풀렸고, 해방 후 감격에 찬 서울 거리에서 다시 만나 묵은 관계를 청산하는 폭주 끝에 초창기의 감회를 되찾았다고 한다.
-'조선문단사'에서 인용-
3) 서울말 평양말 염상섭연구/김윤식저
염상섭은 김동인에게 자랑스럽게 단호하게 지적한 것이 있다.
“너는 서울말을 모르지 않느냐?”
이처럼 김동인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언어의 표현능력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최후로 작가에게 사사로이 청할 것은 경어와 서도의 방언을 혼용치 마시라 함이라
염상섭, <2년후>와 <거츠른 터>, 개벽, 1924. 3,
뒷날 내가 아내를 잃고 독신으로 지낼 때 상섭은 누차 나더러 경기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고하였다. 춘원의 소설문장이 그처럼 화려한 것은 춘원 부인 허씨의 어학 코우치의 덕이라 하며, 경기여인의 호변이 소설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뜻으로 ~ <중략> ~ 상섭은 자기의 경기인인 풍부한 어휘를 아낌없이 소설상에 썼다.
김동인 전집(6)
김동인은 집안의 귀공자여서 폐쇄적 공간의 말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도 먼저 일본어로 구상하고 한글로 옮겼다고 할 만큼 우리말 구사능력에서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중인적 분방함으로 잘 알려진 염상섭을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염상섭은 중인이었기에 다양한 대상과 언어교류를 통해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문체를 가질 수 있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김동인에 대해서 그의 삶과 문학의 양상,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서 나타내고자 한 기법, 염상섭과의 논쟁과 짧은 비교를 통해 동인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존심의 사람이었고 주체할 수 없는 광기의 사람이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시도했다. 최초의 순문학지 창조를 펴낸 것, 근대적인 문체를 작품에서 시도하고 유미주의, 자연주의, 최초의 평론, 춘원연구 등 그는 많은 것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어설펐고 완벽하게 이룬 것은 없었다. 그의 삶과 문학을 보면서 그런 그의 작품 시도들이 이해가 되었다. 귀하게 자랐고 끈기 없는 그의 삶이 이러한 문학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비판만 할 수 없다. 그가 끊임없이 시도한 실험들과 문학을 문학 그자체로 봐야한다는 순수한 예술지상주의는 일제시대 현실 속에 자유하지 못했던 소설 들 속에서 또 하나의 다른 영역을 개척했다고 하겠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시도했던 최초와 실험들이 열등감과 비교의식에서 나온 것 같다는데 있다. 그리고 결국엔 친일로 돌아섰던 그의 변절, 생활고에 통속소설과 야담들에서는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 자신의 문학적 한계로 인해 근대소설의 여러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완성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그의 작은 시작들로 인해 비록 그 자신은 문학을 완전히 완성하지 못했을 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동인 작가의 생애와 문학 강인숙
김동인의 생애와 문학관 - 그의 평문을 중심으로 - 김치강
김동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 김윤식
金東仁小說의技法硏究:初半期小說을中心으로/劉國煥
염상섭연구/김윤식저
한국문학통사 5 - 조동일 저
金東仁小說硏究:短篇小說을中心으로/鄭春萬
  • 가격1,5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8.03.23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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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6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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