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무덤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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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고구려의 무덤양식

2. 백제의 무덤양식

3. 신라의 무덤양식

4. 중국과 일본의 무덤양식


Ⅲ. 결론

본문내용

9대 무열왕릉.
⑤ 봉토 밑에 장판석으로 둘레돌을 쌓고 탱주에 십이지신상을 양각(陽刻)한 형식:
제28대 진덕왕릉 제35대 경덕왕릉 제41대 헌덕왕릉
⑥ 봉토 밑에 장판석으로 둘레돌을 쌓고 십이지신상 ·석사자 ·문인석 ·석화표 ·능비 등 의 표물을 거의 완비한 형식:
제33대 성덕왕릉
괘릉 괘릉십이지상
괘릉석수 괘릉무인석
4. 중국과 일본의 무덤양식
(1) 중국
고대 중국 무덤문화는 풍부한 생산, 생활용품 및 기이한 보물들을 지하에 수장해 방대한 규모의 지하박물관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무덤제도는 사회풍속, 전통예의, 종교관념을 반영하고 등급, 가족애, 민족애 등 각종 복잡한 인소를 포함하고 있다.
구석기시대 말기 인류사회에는 이미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풍속이 형성되었다. 베이징 주구점 산정동인의 매장 풍속은 중국 무덤제도의 맹아로 인정받고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무덤의 위치, 형식, 방향, 수장품 등 방면에서 점차 일정한 규칙을 형성했다.
노예사회 계급분화가 심해지면서 수장품 수량이 증가하고 사람을 산채로 순장하는 것은 예의제도 규범에 속하게 되었다. 서주시기 "鼎 진열" 무덤제도는 "鼎"으로 무덤주인의 신분을 표징하는 것으로서 이때로부터 점차 엄격한 제도가 형성하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무덤옆에 식수하는 풍속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중국 고대 무덤형식이 능묘의 형식으로 발전되었음을 표징한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권력의 집중은 무덤을 더욱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내게 했다.
한조때 무덤은 여러개 묘실로 이뤄졌으며 면적이 크고 한개 무덤은 수많은 평면을 구성했다. 한조시기 토용의 종류와 표현수법을 볼때 진나라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다양했으며 당시 다채로운 생활방식과 특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한조때 또한 죽은 사람 육체의 영원함을 추구했으며 오늘날에도 해석할 수 없는 방부술(防腐術, 부식하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을 창조했는데 그중 마왕퇴와 연운항의 한조 여자시체가 바로 생동한 예다. 중구 고대 유명한 금루옥의도 바로 이러한 이념하에 출현한 것이다.
위진시기에 이르러 수장품을 묻는 등 화려한 무덤제도가 점차 사라지고 묘지, 비석, 제사 등 기념성 표식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당조때 왕릉 건축제도는 두가지가 존재했는데 하나는 위진시기의 무덤제도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원위의 봉토식 무덤이다.
명청시기에 이르러 중국 무덤제도는 또 한차례의 고봉을 이루었으며 명13릉과 청조시기 청동릉, 서릉의 규모가 그 생동한 예로 된다.
일부 사람들은 중국 고대 무덤은 중국 고대 사회생활 및 문화가 인류역사의 강에 비춘 그림자라고 하며 지하 문물창고, 지하박물관이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고대 무덤으로부터 고고학자들은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예술 등 방면의 중대한 문제들을 연구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수장된 문물에서 고대역사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본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고분시대 무덤을 대표하는 것은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상의 무덤이다. 앞부분이 사각형이고 뒤는 원형을 이룬다. 그 분포는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거의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있으며 거대한 분묘에서 소규모 분묘까지 수 백기에 이른다. 최근에는 한국의 남부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무덤이 알려졌다. 전방후원분 중에 대표적인 것은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 또는 대선릉고분(大仙陵古墳)이라고 부르는 거대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무덤은 봉분의 길이만 486m에 달하며 전방부는 폭 305m에 높이 33m, 후원부는 직경이 245m에 높이가 35m이다. 전체는 2중의 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의 외주 길이는 2,718m이다.
전방후원분에서는 흙으로 사람이나 기물의 형상을 빚은 토기의 일종인 하니와가 주로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의 일면을 전해주고 있지만 누가 이런 거대한 분묘를 축조하였으며 여기에서 어떤 제의(祭儀)가 이루어졌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7세기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천황릉은 급격하게 변모하게 된다. 우선 규모가 크게 축소되며 그 형태도 반구형의 단순한 분묘 형태로 바꾸게 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천황릉은 반원형의 봉분과 그 앞에 설치한 간단한 형태의 제단을 갖춘 모습이며 별도의 제사용 시설이나 봉분을 수호하는 조각물을 배열한 사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천황릉은 막부 정권이 물러나고 천황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19세기 말에 와서 규모도 커지고 봉분의 형태에도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즉, 봉분의 형태가 고분시대 전방후원분을 연상시키는 방형과 원형의 결합 형태를 취하고 봉분 앞에는 네모반듯한 제단이 갖추어진다. 그러나 이런 변화 외에는 동아시아의 다른 능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석조 조각물을 배치한다거나 제사를 대비한 별도의 제례용 건물을 조성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Ⅲ. 결론
지금까지 삼국의 무덤양식과 중국, 일본의 무덤양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삼국은 서로 영토가 나눠졌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비슷한 양식의 무덤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발해의 무덤양식과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렇듯 무덤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그 당시 문화와 생활상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며 삼국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덤양식은 우리나라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건축양식과 기법을 알아보는 좋은 증거로서 높은 가치가 있으므로, 앞으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자료, 인터넷 사이트>
· 김정남의 역사교실
· 네이버 백과사전
· 정재준.「통합한국사」이든북스. 2007
· 김환대.「왕릉현장기행 신라왕릉」 한국학술정보(주). 2007
· 조유전.「발굴 이야기; 왕의 무덤에서 쓰레기장까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여정」(주)대원사. (1996) 101-121p , 238-265p.

키워드

삼국시대,   무덤양식,   고분,   고구려,   백제,   신라,   무덤,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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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2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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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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