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정치의 이해]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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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시아정치의 이해]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중일 전쟁

2. 최근 중.일 관계

3. 중국의 입장
1) 강주석의 방일.
2) 과거사 사죄 문제
3) 강주석의 자작시에 숨겨진 日비판

4. 일본의 입장
1) 일본 천황 과거사 어록
2) 과거사 사죄 거부

5. 주변국 입장
1) 대만입장 - '과거사'힘겨루기의 중·일관계서 미묘한 대만
2) 중언론의 일본 비난
3) 일본 언론의 경종 울리기
4) 일본, 중국에 서면사죄 왜 꺼리나

6. 평가 및 해결 방안

본문내용

미국작가 아이리스 창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저서 `난징의 겁탈'에서 당시 사건을 조명한 것은 일본 치하 중국이 겪은 고통을 미국민들에게 주지시키는 중요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 南京대학살 폭로 일본내 재판,中-日 외교전 비화
1937년 12월 난징(南京)대학살의 참상을 폭로한 한 일본인의 일기를 둘러싸고 명예훼손사건 재판이 중일(中日)간 외교전으로 번지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87년 일본군 병사출신인 아쓰마시로(東史郎86)가 난징 대학살 때 자신이 목격한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를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비롯됐다. 일기 공개 6년 뒤인 93년 4월 부대동료였던 하시모토(橋本光治)가 느닷없이 아쓰마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일기내용 중 동료 하시모토가 중국인을 우편배달용 자루에 집어넣어 난징시 고등법원 맞은편에 있는 연못 속으로 처박았다. 자루에는 수류탄을 매달았으며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몇초 후 물 속에서 수류탄이 터졌다는 묘사가 사실무근이며 난징대학살 관련 폭로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 재판은 명예훼손죄 성립을 인정했다. 96년 4월 도쿄(東京)지방법원에 이어 이달 22일 도쿄고등법원은 일기 속에 묘사한 잔학한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하시모토에게 50만엔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내용이 알려지자 중국 각계에서 규탄성명이 쏟아지는 등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난징대학살연구회 가오싱주(高興祖)회장은 일기공표 후 항의를 하지 않던 하시모토가 6년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려는 세력의 사주때문이라며 이 재판은 역사왜곡세력의 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비난했다. 난징시법학회 등 관련 중국단체들도 일제히 항의하고 나섰다. 중국측의 항의가 거세지자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25일 일본은 난징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이번 사건은 개인의 명예 훼손 여부에 관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주방자오(朱邦造)중국 외교부대변인은 28일 이번 사건은 단순한 민사소송이 아니다며 이는 일본의 소수 우익세력이 재판절차를 빌려 난징사건을 부정하려는 것으로 일본법원이 역사사실을 왜곡했다고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6. 평가 및 해결 방안
<특파원 칼럼>中-日 관계는 신뢰회복부터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흔히 一衣帶水(일의대수)라는 말로 일컬어진다. 그만큼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까지 긍정적 영향을 강하게 끼치면서 우호적인 교류의 역사를 공유해왔다. 이 점에서 양국관계는 갈등으로 점철된 한일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양국의 역사는 무엇보다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선 문화 교류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불교에서부터 시작해 유교, 주자학, 양명학 등 중국 사상의 정수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일본에 전해진 것은 세상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대신 일본은 거의 2세기동안 심혈을 기울여 쌓은 유럽의 학문과 제도 등의 이른바 蘭學(난학)을 19세기 초부터 중국에 소개하는 보은을 했다. 15세기 혼란기의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德川)막부의 사상적 기초가 주자학이라거나 쑨원(孫文)이 제창한 三民主義(삼민주의)에 메이지(明治)유신의 정신이 면면히 흐른다는 통설에는 다 이런 나름의 배경이 있는 것이다. 秦始皇(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초를 찾다 먕명한 2천2백여년전의 徐福(서복)이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는 양국의 인적 교류사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예컨대 중국의 史記(사기)와 後漢書(후한서), 일본의 神皇正統記(신황정통기), 古事記(고사기)등 양국 사서들은 3세기에서 6세기까지 야마토(大和)시기의 일본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했다거나 唐(당)나라때 일본의 學僧(학승)들이 대륙에 수천 명이나 유학했음을 기록으로 증명한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이런 교류는 더욱 빈번해진다. 이중 단연 돋보이는 경우는 쑨원과 대문호 루쉰(魯迅)의 일본과의 인연이다. 둘 모두 상당 기간을 일본에 장기 거주하면서 혁명과 문학을 통한 구국의 일념을 불태운 것이다. 일본 이름 나카야마를 그대로 사용한 쑨원의 호 中山(중산)의 존재나 루쉰의 작품 곳곳에서 일본 색채가 드러나는 것은 때문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20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만 놓고 보면 중일 관계는 일의대수라는 단어로만 표현이 가능한 우호 협조적 관계였던 것이다 양국의 이같은 관계는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대륙 침략으로 완전히 끝나버린다. 특히 30만명 이상의 양민을 도륙한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대학살은 아직까지 양국 관계 발전에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를 일컫는 한젠(漢奸)이 아직도 중국인들의 욕중에서 가장 심한 욕으로 남아 있는 만큼 당시 중국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난 25일 일본을 국빈 방문한 중국의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 겸 총서기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와 신화(新華)통신등을 비롯한 중국 언론이 연일 확인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는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장주석이 26일 발표된 공동성명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나 이어 천황주최 만찬에서 중국인들이 어려운 시기에 입던 인민복 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그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솔직히 피해 당사자인 중국의 입장에서 볼때 장주석의 불편한 심기 표출은당연하다.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죄를 한다면서도이를 공동성명에 삽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과가 과연 진심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태도에 다름아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전총리가 작년 방중 시에 사과의 뜻으로 以和爲貴(이화위귀평화를 귀히 여긴다)라는 용어를 사용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중국이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실천하기 어렵지 않다. 진정한 사과를 통해 신뢰를 회복,21세기의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비관적이다. 일본은 앞으로도 계속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교훈을 대외적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洪淳道 베이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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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1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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