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과 홍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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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은 『천조 전무제도』라는 문서를 공포했다. 그것은 지상천국의 조감도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이 인쇄되지는 않았던지 1854년 말까지 청조측이 입수한 다량의 태평천국 간행문서 속에 이 책만은 보이지 않고 태평군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 위에 이 제도가 결국 실현되지 않았던 점도 있어 도대체 어디 까지 진심으로 반포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하는 의견도 일부 연구자 사이에는 있다. 그러나 1860년에 같은 것을 다시 간행하고 있다. 또 전술한 러틀러 호의 선잔 멜러쉬의 질문에 대한 동왕의 답변 거운데도 이 제도의 기본 정신과 합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천조 전무 제도』의 근본 이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천부상주황제의 하나의 대가족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고 모든 물건을 상주(上主)의 것으로 하면 주(主)가 이것을 운용하여 천하의 한 대가족의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평등하게하고 모든 사람들을 난의 포식하게 한다. 이것이 곧 천부상주황제가 특별히 태평진주에게 명하신 구세이 취지이다.
『천조 전무 제도』는 배상제교 창립이래 홍수전이 반복해서 말해온 「천하일가」의 이상과 「원도권세훈」에 보이는 「대동」의 이상을 사회제도로서 구체화한 것이다. 거병 이후 태평군 안에서 행해져 온 군사적 공산주의 제도가 그 원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제시되는 토디의 공유와 균분 잉여 재화의 공동 사용이라는 평등주의 이념은 경지의 소유권과 재산이 소지주,관신,부상의 손에 집중하여 방대한 농민과 유민이 기아선상에서 고통받고 있던 당시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으로서는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태평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뒤를 추적해온 흠차대신 향영이 이끄는 1만 수천명의 청군이 성밖 약 5킬로미터 지점의 효릉위에 도착하고 여기에 『강남대영』을 점령했다. 태평군의 점령애 나선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중추를 차지하는 광서.광둥인에 대한 호남 등 기타 지방 사람들의 반발과 다소나마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 그리고 특히 「평등」윤리에 의한 유교적 신분윤리의 부정과 유서의 파괴에 대한 독서인 측의 위기감, 나아가 우상 파괴에 대한 서민의 반감을 광벙위하게 조직화 하려고 하였다.
1854년 4월 28일 증국번은 직접 수군과 육군을 지휘하여 장사 북방 30킬로미터의 정항에서 태평군과 싸웠다. 그러나 여기서 대패하자 증국번은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물속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고 간신히 종자에게 구출되었다. 그러나 그 이틀후 상담에서 장강유역에서의 태평군 최초의 대패배라는 큰 타격을 가하여 정항에서 입었던 타격을 회복하였고 장사에서 태세를 정비할 여유를 얻었다. 7월 상순 장사를 출발한 약 2만의 상군은 7월 하순 악주를 되찾고 8월에는 성릉기에서 증천양 군을 격파하여 태평군을 호남의 모든 지역에서 철퇴시켰다. 이어서 호북으로 나아가 10월에 무한을 되찾고 장강을 내려와 12월 초에는 구강을 탈회하고 나아가 호북을 점령했다. 이리하여 서정의 성과가무위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천경도 위협을 받게되는 위기가 닥쳐왔다. 태평군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식량도 부족해졌다. 충왕은 "아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라건데 대책을 내려서 인심을 안정시키고 싶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그러나 천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모두 탄로를 먹어라.그렇게 하면 장생할 수 있다.
탄로란 [구약성서] [출애굽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의 거사에서 온 것으로 들풀을 가리킨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황야에서 굶었을 때.... 아침이 되자 숙영의 주위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마르자 황야의 표면에 얇은 비늘과 같은 것이 내렸다. 사람들이 모세에게 묻자 "이것은 주가 당신들의 음식으로 내리신 빵이다."라고 답하였다. 탄로는 먹을수 없는 것이라고 신하가 아뢰자 천왕은 "우선 짐이 먹어 보겠다"고 말하고 천왕부의 빈터에 난 잡초를 떡으로 만들어 올리게 하여 매일 이것을 먹었다. 그리고 모두 이를 비축하라고 명하였다. 충왕은 몰래 굶주린 주민을 성밖으로 탈출시켜 13∼14만 명이 성밖으로 달아났다. 성안에는 도적이 횡행하고 야간에는 강도로 변한 병사의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홍수전이 이 말기 증상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그는 이미 꿈과 현실의 세계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아다.
1864년 5월 그는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약 20일을 앓은 후 6월 1일 50년 5개월의 생애를 마감하고 승천하였다. 천왕 사후 49일 째인 7월 20일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은 터널을 파고 들너가 태평문을 폭파하고 성안으로 쇄도하여 천경을 점령하였다. 태평 천국은 이렇게 하여 막을 내렸다.
19세기 중반 근대의 발소리가 이미 전 세계에 들리고 있던 시대에 홍수전은 정말로 상제 여호와의 차자 그리스도의 아우라고 믿었다. 그리고 요마를 일소하여 모든 인간이 형제자매로서 공정하게 살아갈수 있는 지상천국을 수립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도 황제와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 사명은 반드시 실현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음에 이를 때 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역경에 서게 될 수록 이 신앙에 한층 강하게 매달렸다. 이에 의해 서구 세계와 중국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광대한 중국의 대지를 파고 들었다.
광기와 종이 한장 차이 혹은 광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정력적인 신념과 이에 기초한 유토피아의 꿈은 요마 청조를 부정하여 무너뜨리려고 하는 남경까지의 고난에 찬 싸움속에서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그만큼 대운동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유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홍수전 그의 신앙과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다소 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이다. 그는 종교의 힘으로 권력을 쥐었으나 너무 비능률적인 나머지 오히려 백성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만들고 끝내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은 역시 전무후무한 혁명이었으며 홍수전 또한 동양에서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역적이 아닌 역사속의 위대한 인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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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2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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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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