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의 생애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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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운 최치원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최치원의 생애

1) 출생 및 유년기

2) 당나라 유학기

3) 신라로의 복귀

4) 은거

3. 결론

본문내용

모난 나무를 박는 것과 같이 서로 모순된다 하여 서로 한쪽만 고집한다. 내가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설(說)하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사(辭)를 해치지 않고 사(辭)로써 뜻을 다치지 않을 것이니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일단(一端) 뿐이겠는가. 각기 타당한 바가 있는 것이다. 或謂身毒與闕里之說敎也 分流異體 圓鑿方 互相矛盾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禮所謂 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 (眞鑑禪師大空塔碑銘)
고운은 이렇기 삼교(三敎)를 포괄적이고도 융화된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관은 ‘풍류(風流)’의 사상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말한다.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중생을 친히 교화하고 있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삼국사기 권 제4 진흥왕 37년)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융합적인 종교관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고운의 일생에 있어 대체로 그 초기와 중기에는 유가적 지향을 강하게 가졌다면 점차 당과 신라사회에 실망하고 자신의 입점(立點)을 상실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불교와 도교 쪽으로 기울어 갔다 재당시절의 젊은 나이로서는 우선 쪼들린 생계와 영달의 성취가 시급했던 것이다. (최신고, 위의 글, 37쪽)
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논의와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초기의 유가 지향적이었던 고운의 사상은 당 유학기의 영향으로 융합적 종교관으로 뻗어가다가, 도무지 융합할 수 없는 벽(신라의 정치적 현실)과 맞부딪히자, 대립하여 싸우는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가 사상의 축이 부러지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가야산(伽倻山) 은둔은 젊은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은거의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나, 여기서는 최영성의 논의를 따라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명기(明記)한 대로 고운이 아찬에서 면직된 효공왕 2년(898) - 왕건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왕에게 미움을 받자 은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 을 은거의 시기로 하겠다. (최영성, 최치원의 철학사상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9, 30~31쪽 참조)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고운이 좇던 ‘풍류’에서 현실적인 측면이 사라져버리자, 곧 그의 말대로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싸’ 버리고 그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3. 결론
본고에서는 고운의 생애를 네 가지 중심 사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먼저 ‘출생 및 유년기’에서는 고운의 출생지와 가계(家系) 등을 알아보고, 고운이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주목을 받았음을 보았다.
‘당나라 유학기’에서는 고운의 도당 유학의 배경을 계층적 측면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신라의 골품제도로 인해 육두품 출신들이 진골 귀족들과 나란할 정도로 출세할 방법은 도당 유학이나 승려가 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운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고, 나름대로 큰 영달을 이룬다.
‘신라로의 복귀’에서는 당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친 그가 돌연 복귀를 선언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당시 당의 세계주의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고, 고운의 성공을 둘러싼 시기와 차별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양 민족 간의 이질성 속에서 고운은 혼란과 외로움을 느꼈고, 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그는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복귀한 뒤에도 이런 갈등은 회복되지 않았다.
‘은거’에서는 귀국 뒤 오히려 더욱 심해진 치원의 내적 갈등 양상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고찰을 시도해 보았다. 시무책이 비록 가납되었으나 그는 ‘아찬’의 지위 밖에는 오를 수 없었고, 또한 그는 지방관 자리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그의 작품들에서는 극심한 소외감과 체념적 인식이 보였다. 특이한 점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적극적인 현실 대응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정치관과 종교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대립을 싫어하는 그의 성향은 ‘융화’의 사상을 낳았으나, 고운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신라의 현실과 부딪히자 그의 유가적 지향이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고운은 가야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본고의 논의를 이상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고운이 돌연 귀국한 까닭과 가야산 은거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러한 결과를 통해 고운의 사상적 측면 및 성격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치게 실증적 방법론에만 치우쳐 작품과의 연계성을 통한 생애 구성 및 사상연구가 부족한 점이 있고, 따라서 엄밀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이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작품 발생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겠고, 보다 치밀하고 정확한 분석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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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 최치원의 철학사상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9.
최완수,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

키워드

최치원,   고운,   육두품,   신라,   작가론,   생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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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1.03
  • 저작시기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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