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미륵][불교 미륵신앙]불교 미륵의 기원, 불교 미륵의 사상, 불교 미륵신앙의 역사적 의의, 불교 미륵신앙의 특징, 불교 미륵신앙과 신종교, 불교 미륵신앙과 보살신앙, 불교 미륵신앙의 형상화 사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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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 미륵][불교 미륵신앙]불교 미륵의 기원, 불교 미륵의 사상, 불교 미륵신앙의 역사적 의의, 불교 미륵신앙의 특징, 불교 미륵신앙과 신종교, 불교 미륵신앙과 보살신앙, 불교 미륵신앙의 형상화 사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불교 미륵의 기원

Ⅲ. 불교 미륵의 사상

Ⅳ. 불교 미륵신앙의 역사적 의의

Ⅴ. 불교 미륵신앙의 특징
1. 미륵이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2. 역사적으로 미륵을 신봉하는 여러 종류의 이질적인 종교 집단이 구성되어 왔다는 점이다
3. 한국의 미륵 신앙이 금세기에 와서, 특히 원불교의 출현과 더불어 질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Ⅵ. 불교 미륵신앙과 신종교

Ⅶ. 불교 미륵신앙과 보살신앙

Ⅷ. 불교 미륵신앙의 형상화 사례

참고문헌

본문내용

발연수라는 곳의 석기에 기록되어 있는 진표의 사적을 비교해 보니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석기의 내용을 새로이 기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발연수의 석기는 고려 신종2년(1199)에 瑩岑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진표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명주지방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진표는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해 주었다. 그러자 문득 고성 해변의 무수한 고기들이 스스로 죽어 나오므로 사람들은 이 고기를 팔아 식량을 마련하여 아사를 면했다.
石記에 기록된 위의 내용을 보면 흉년으로 인해 아사하는 민중의 모습을 통해 지금이 말세라고 하는 민중의 인식이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말법의 위기가 진표가 설한 미륵의 계법으로써 해소될 수 있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미륵의 하생을 통해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일연의 기록과 石記의 기록에 큰 차이는 없다. 무극이 지적했던 두 기록의 차이점은 바로 그 이후의 사적에서 확인된다. 석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표는 미륵에게서 계법을 받은 뒤 금산사를 창건하려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대연진의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으로 하여금 그를 거느리고 가게 하여 며칠 내에 금산사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진표가 금산사를 완성한 것은 전적으로 왕실의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경덕왕과 외척들은 진표를 불러 미륵의 계를 받고 곡식과 황금을 하사했는데, 진표는 이로써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불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石記에 기록된 미륵은 말법의 세에 있는 민중을 구원시켜 줄 메시아이며 민간신앙의 용왕에 의해 보호되는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비해, 일연의 기록에 나오는 미륵은 경덕왕이나 외척과 같은 왕실에 의해 보호되고 권장되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두 기록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발연수 石記의 기록이 민중에게 회자되던 이야기가 별다른 첨삭 없이 기록된 것인 데 비해, 일연의 기록은 이러한 이야기가 어떤 집단의 의도에 의해 개편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기록에 의하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경덕왕대는 즉위 3년, 4년, 7년, 18년, 20년, 23년의 혜성 출현, 가뭄과 메뚜기 떼, 지진 등으로 하층 민중은 기아에 허덕여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륵의 하생을 통해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했고, 왕실에서는 이들 민중의 절망을 무마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에서는 민중의 메시아인 미륵이 바로 왕실에 의해 보호되고 권장되는 것으로 재구함으로써, 미륵이 곧 왕실을 수호하고 있음을 전파하여 위기적 상황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중의 반란을 봉쇄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밖에 <남백월산의 두 성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성덕왕 8년(709)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각각 미륵과 미타를 염송하며 수행하다가 관음보살의 현신인 여인의 도움을 받아 미륵불 및 미타불로 현신성불하였다는 현신성불담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이 세상 밖을 동경하여 중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백월산에 암자를 마련하고, 노힐부득은 미륵을, 달달박박은 미타를 염송하며 수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달달박박에게 찾아와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달달박박은 이를 거절하고 노힐부득에게 가도록 하였다. 노힐부득은 자신을 찾아 온 여자를 거절하지 못하고 머물게 하였다. 그날 밤, 노힐부득은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은 뒤 목욕을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목욕하고 난 물은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노힐부득은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그 물에 목욕을 하고 미륵존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바로 관음보살로 노힐부득의 대보리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었다. 다음날 노힐부득을 찾아온 달달박박도 역시 그 물에 목욕을 하고 무량수불이 되었다. 그리고 두 성인은 사람들에게 불법의 요의를 설하고는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이처럼 이 이야기가 미륵과 미타의 현신성불담이기는 하지만, 미륵을 염하던 노힐부득이 먼저 미륵으로 성불하고 그 뒤로 달달박박이 미타로 성불했다는 점, 그리고 미타상이 강당에 안치되는 데 비해 미륵상은 사찰의 중심인 금당에 안치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이 이야기의 핵심은 미륵의 현신성불에 두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에는 755년,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일을 전해 듣고 절을 지어 미륵존상과 미타상을 안치하도록 명했다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현신성불한 지 4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뒤, 경덕왕은 즉위하자마자 신라 당대에 미륵이 하생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주목하여 그 사실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경덕왕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던 신라 왕실의 위기의식이 놓여 있다. 성왕에 의해 이상국토가 이루어진 당래에 하생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이 지금 하생하였다고 함으로써 지금이 곧 이상국토가 실현된 당래라는 사실을 전파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왕권을 보호하고자 했던 신라왕실의 왕권수호에 대한 열망이 여기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50여 년 전에 미륵이 하생했던 사실이라도 끌어들임으로써 지금이 곧 이상국토임을 전파함으로써 왕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왕실의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라의 미륵이야기는 각 역사단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미륵이 왕권수호의 이념적 근거로 기능하는 양상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손준영(2008) / 미륵 이야기, 비씨스쿨
서철원(1988) / 신앙과 학문,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이제민(2005) / 한국의 다종교사회에서 종교들의 만남, 신앙과 삶 12호, 부산가톨릭대학교출판부
장지훈(1997) / 한국 고대 미륵신앙연구, 집문당
장영수(1982) / 한국의 미륵사상, 서울 : 한국미륵사상연구
주강현(1995) / 마을로 간 미륵, 서울 : 대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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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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