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국제관계사 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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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丹東시 개관
2. 호산장성
3. 압록강 단교
4. 한인의 이주와 단동의 경제적 역할
4-1. 한인의 이주
4-2. 단동의 경제발달
5. 단동의 독립운동지
5-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이륭양행
5-2. 대한독립청년단 본부
6. 한국전쟁과 항미원조전쟁
6-1. 항미원조기념관 소개
6-2. 한국전쟁과 항미원조전쟁
6-3. 한국전 참전의 대내적 영향

본문내용

지부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항미원조’운동을 주관하고 지도하였다.
이러한 ‘항미원조’운동은 51년 6월부터 다시 세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애국선서운동’, 참전한 중국지원군의 전투기와 중무기 구입을 위한 ‘헌납운동’ 그리고 참전군인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지원운동’이 그것이다. ‘애국선서운동’은 우선기업가와 공장주들이 모여 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고 생산증가를 위해 스스로 맹세하고 세금의 납부를 신속히 할 것과 북한에 대한 헌납을 서약하는 ‘애국적인 협정’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노동자와 농민들까지도 이 협정에 서약하고 대규모 반미시위를 벌였다.
‘헌납운동’의 목적은 참전 중국지원군의 전투기와 중무기 구입을 위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폭동적인 애국주의 운동과 함께 모든 국민으로부터 헌납을 강요한 결과 운동을 시작한 51년 6월부터 52년 2월까지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무려 6230여만 위안 이상을 헌납받았으며, 이는 당시의 전투기 3710대의 가격과 맞먹는 액수였다.
참전군인가족의 생계를 위한 ‘지원운동’은 참전군인 가족들을 위한 생계지원을 일반 국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역시 국가재정의 부담을 줄여보고자 하는 것으로써, 농촌에서는 군인가족들을 위하여 대신 농사를 지어주고, 도시에서는 식량, 옷, 생필품 등을 선물 형식으로 제공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항미원조’운동은 51년 말부터 점차 경제적인 애국증산운동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여, 생산방법의 개량, 증산, 절약의 목표가 설정되고 민중들이 서로 경쟁하여 신기록을 창조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중국이 이러한 급진적인 대중운동을 주도할 수 있게 해준 상황적 요인은 말할 것도 없이 대외적인 위기인 한국전쟁이었고, 더구나 한국전 참전이라는 항독소(抗毒素)의 이용은 그들에게 내부의 오물을 청소하여 사회주의 개조를 단행하고 정치기반을 견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② 중국군의 현대화와 재정비
군의 현대화라 함은 무기·장비의 현대화뿐만 아니라 지휘조직, 군사제도, 전략 등을 포함한다. 한국전에서 세계 최강 미국과의 군사적 대결은 중국으로 하여금 현대전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군의 현대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한국전 전까지 중국군의 무기는 혁명전쟁 시 국부군으로부터 노획한 미제무기와 항일전쟁 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일제무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중국군은 무기체계의 통일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원조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소련의 대량의 군사원조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한국전의 참전이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전에는 소련으로부터 어떠한 무기도 제공받지 못하였으며, 참전 후 상당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소련의 무기를 대량으로 지원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군사원조를 대량으로 받기 시작하면서 중국군은 현대화된 소련제 무기와 장비로 무장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소련군 전문가들의 지도아래 소련군의 체제, 지휘, 편제, 훈련에 따라 질적인 현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대규모의 현대국방산업 역시 소련에 의존하여 추진되게 되었다. 이러한 군의 현대화를 자체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중국으로서는 이를 완전히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소련이 중국의 군사를 지도하고 통제한다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중국은 이를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후반기에 이르러 중국군은 이미 유격전을 수행하던 단일병과의 군에서 다병과의 현대화된 정규군으로 성장하여 한국전 참전초기와는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 군대로서 군의 질적 재정비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상적으로 동화되기 어려운 국부군 출신자들의 사상성과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고, 이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 한국전의 참전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참전 지원군을 편성함에 있어 중국 정예군을 주축으로 하고 투항한 국부군 출신자들을 부수적으로 하여 문제성 있는 국부군 출신자를 주된 전투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넘은 지원군 중에는 대량의 국부군 출신의 장교와 사병들이 있었고, 이들은 전쟁에 나가기 앞서 모두 충성을 위한 지원서, 결의서 등을 작성하여야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이 끝난 후의 중국군은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된 충성스러운 군대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국전쟁을 중국군으로 하여금 다방면에서의 현대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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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20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6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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