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식생활과 놀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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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Ⅰ. 조선시대 식생활문화
1. 조선시대 식생활의 특징
1) 조선시대 주식
2) 조선시대 끼니
3) 대식(大食)
2. 조선시대의 궁중과 서민의 음식문화
1) 조선시대 궁중음식문화
(1) 궁중음식문화의 특징
(2) 궁중의 일상식
2) 조선시대 서민음식문화
(1) 서민음식문화의 변천
① 조선 초기
② 조선 후기
(2) 서민의 식생활 풍속

Ⅱ. 조선시대 놀이문화
1. 민속놀이의 정의
2. 조선시대 사회적 성격과 그에 따른 놀이 분류
1) 조선 시대의 사회적 성격
(1) 엄격한 신분사회
(2) 농업사회와 마을 단위의 공동체사회
2) 조선시대 사회적 성격에 따른 놀이문화
(1) 신분사회 특성에 따른 놀이문화
(2) 농업사회와 마을 단위의 공동체사회 특성에 따른 놀이문화(두레놀이)

맺음말

본문내용

그대로 기 싸움으로 변한다. 기세배와 기싸움은 싸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싸움을 통하여 지역의 연대를 확인하는 사회제도적 장치이기도 했다. 기세우기는 상원날 밤 긴 장대 끝에 종이와 실로 기를 만들어 달고는 불에 태워 그 재가 멀리 날아가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신수가 좋고 액(厄)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단오- 두레굿
단오는 농번기이기 때문에 상당한 준비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차원의 대동놀이가 아니라 개인놀이, 소집단놀이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김매기를 하면서 두레풍장(두레풍물)을 하였는데 이를 두레굿이라고도 한다. 본래 두레굿은 농부들의 풍농을 위한 굿에서 굿패들의 행락(行樂)으로 바뀌었다. 풍장을 전담하는 두레의 풍물패들은 농기를 앞세우고 이동을 하거나 논매기를 할 때 흥겹게 농악을 울려 신명을 돋운다. 두레패의 농악은 농기(農旗)·영기(令旗)·꽹가리·징·북·장구로 편성되며 쇠꾼들은 농복(農服)을 그대로 입는다. 농기는 깃을 달고 큰 기폭을 다는데 용을 기리기도 하고 ‘신농유업(神農遺業)’,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등의 글자를 쓰기도 한다. 이와 같은 농기의례는 두레 공동의례의 핵심을 이루는데, 농기는 농민들의 자긍심의 표현으로 두레의 모든 행사와 노동이 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③ 칠석과 백중- 두레먹기
음력 7월은 농촌의 하절기 행사가 벌어지는 시기다. 백중(伯仲) 무렵은 김매기를 마친 시기로 고된 과정을 일단락 지은 농민들은 농사를 마무리 짓고 축제를 벌인다.
칠석(七夕)과 백중(百中: 음력 7월 보름날)에 걸쳐 행해진 두레먹기는 두레의 셈을 끝내면서 날을 잡아 하루 종일 노는 행사이다. 두레먹기는 들돌들기, 우물고사, 합(合)굿이 결합된 상태이다. 두레먹기에 관련된 명칭은 호미걸이, 호미씻이, 풀멕이, 풋굿, 장원례, 음주례 등으로 각각의 지방마다 이름과 내용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호미씻이는 여름 농사가 거의 끝나 밭이나 논을 매는 호미가 필요 없게 되어 씻어 둔다는 것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시냇가는 산기슭의 나무 그늘에 모여 징·꽹가리· 날날이·북·장구 등을 치면서 흥겹게 하루를 즐긴다. 또 마을에서는 농사가 제일 잘 된 집 머슴을 뽑아 두레장원이라고 하여 머리에 삿갓을 씌우고 황소 등에 태우고 많은 머슴들이 에워싸고 농악을 울리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 집의 주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주식을 한턱내게 된다. 이러한 두레먹기의 목적은 일 년 농사의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고서 노동의 피로를 풀어주는 데 있다. 김매기철이 계절적으로 복중(伏中: 초복(初伏)에서 말복(末伏)까지의 사이)과 장마철이 걸쳐 있어 극도로 피곤해진 심신의 노고를 달래 주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지배계급층에서는 일 년에 하루라도 생산계급을 위로해 주지 않으면 다음 해의 농사를 기약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레먹기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④ 추석- 소멕이놀이
추석은 재배의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천신(薦新: 철따라 새로 난 과실이나 농산물을 먼저 신위(神位)에 올리는 일)하는 수확제로서 자리 잡는다. 따라서 추석에는 수확의례(收穫儀禮)와 관련된 놀이들이 많이 행해졌다. 추석날 밤에는 그 동안의 노고를 풀어버리기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담소와 가무로써 한껏 즐긴다. 소놀이·거북놀이·가마싸움·소멕이놀이·줄다리기·사자놀이·지신밟기·두레길쌈 등의 놀이가 있다. 이진희, 앞의 글, pp. 256~258.
소싸움·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멕이놀이가 진행된다. 멍석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소의 형상으로 꾸며서는 그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하고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하는 놀이이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의 식생활 문화와 놀이문화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전반적인 식생활문화의 특징을 알아보면서 우리가 기존에 당연시 했던 식생활 문화가 조상들의 문화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궁중식생활과 서민 식생활의 대비를 통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서민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주로 궁중의 식문화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문헌들과 자료들에는 궁중에 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다. 서민 식생활이 많은 기록이 없었던 점은 아쉬웠지만 서민들의 식생활이 시기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족하나마 서민들의 식생활 삶 전반에 담긴 문화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삶에서 여가와 놀이는 뺄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놀이를 즐기듯이 우리 조상들도 그 나름의 놀이문화를 향유하였고 그것이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놀이는 단순히 ‘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놀이 속에서 한 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읽어 낼 수 있다. 놀이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놀이가 전해 내려오지만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지 않으며 없어진 놀이도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 문화를 떠올려 보면서 옛 놀이를 부활시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자료》
1. 단행본
김광언,『민속놀이』,(서울: 대원사), 2001.
양혜경,『조선의 풍습 』, (서울: 학민사), 1993.
윤서석, 식생활 문화의 역사, (서울: 신광출판사), 2000.
정연식,『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2』,(서울: 청년사), 2001.
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 문화, (서울: 정신세계사), 2006.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생활사3-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서울: 역사비평사), 2006.
한미라 외,『한국인의 생활사』,(서울: 일지사), 2004.
한복진,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 문화 ,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2. 논문
이진희, 「조선시대 민속놀이의 유형과 특징 연구」,『한국여가레크레이션학회지』25, 2003
3. 사이트
http://www.koreangame.net

키워드

조선,   식생활,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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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2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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