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작품 읽기.. - <자화상>, <길>, <별 헤는 밤>, <간> 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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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윤동주의 생애
2. 윤동주의 시세계
2. <자화상>
3. <길>
4. <별 헤는 밤>
5. <간>

본문내용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이다. 습한 간을 말리기 위하여 햇볕 속에 내놓고 조심스럽게 지켜야 한다고 하고는 느닷없이 독수리더러 와서 뜯어먹으라고 하는데 그 독수리는 자기 자신이 오래 기르던 굶주린 독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으로 엄청난 단절과 비약이 개재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편에서 보면 인간을 위해 고통 받는 영웅적 구세주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이야기에서 그런 영웅적 구세주의 간과 나약한 토끼의 간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프로메테우스는 다시 토끼처럼 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병적이랄 정도로 민감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윤동주가 되어야한다. 제우스의 독수리는 궁극적으로 윤동주 자신의 속을 언제나 아프게 찌르는 그의 양심적 자아가 된다. 깊은 양심은 추호의 부끄러움도 용납하지 않고 그의 속을 자꾸 아프게 쪼아대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는 않는다. 자기가 “오래 기른 여윈 독수리”로서의 첨예한 양심이 유혹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아프게 쿡쿡 쑤셔대는 양상이 벌어지는데 우리는 여기서 셋으로 분열된 자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윈 독수리처럼 자기 양심을 아프게 찌르는 자아, 하나는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것처럼 가책의식을 아프게 느끼는 자아, 또 하나는 그 모든 것을 괴롭게 바라보는 자아이다. 이렇게 셋으로 갈라진 자아는 「또 다른 고향」에도 나타난다.
“나”는 그 독수리에게 “나”의 간을 뜯어먹되 “시름없이” 뜯어먹으라고 한다. 독수리는 오래 여위었는데 이제 간을 뜯어먹을 기회가 생겼으니 신나게 뜯어먹게 되었지만 아무리 먹어도 독수리는 “시름없다” “시름”은 본시 “걱정, 근심”이라는 뜻이지만 의미의 기이한 변화를 입어 “시름없이”는 여기서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 없이, 신나게”라는 뜻이 아니라 “기운 없이, 맥없이”라는 뜻이 된다. 아무리 뜯어먹어도 윤동주의 독수리는 기운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여위고 대신 독수리는 살쪄야 하는데 실상 둘 다 계속 여위어만 간다. 둘은 하나인 까닭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나는 여위어야지”라는 말을 하고서는 곧이어 “그러나” 하고 한 줄을 띄어 긴 여운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생각의 흐름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의 흐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연에서 토끼는 다시 원래대로 바다 밑에서 도망쳐 살아난 것으로 되어 있다. 거북이에게 한번 속아서 “용궁의 유혹에 떨어졌지만, 즉 바다 밑에 빠져 간이 습하게 되는 변을 당하고 다시금 뭍으로 나와서는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한다. 즉, 윤동주는 한번 달콤한 유혹에 잠시 속아 “간이 습하여 졌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는 (햇볕에 간을 말리는) 사이에 자신의 “독수리”에게 간을 먹히 운다. 그런 아픔을 당하면서도 그 유혹만은 “그러나”의 강한 어조에 나타나듯이 완강히 뿌리친다. 어떤 유혹에 처음에는 솔깃하였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멀찍이 물러섰고 이번에는 그로 인한 아픈 가책을 받으면서도 다시는 그 유혹에는 절대로 안 넘어가리라 다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토끼는 없어지고 2연에서 “코카서스”와 “간”으로 암시만 되었던 프로메테우스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라나 우리는 여기서 간을 몸 밖에 꺼내 놓은 토끼와 역시 간이 밖으로 비어져 나온 프로메테우스가 동일시됨을 알 수 있다. 다만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의 죄는 역시 불을 도적한 것이면서도 영원히(“끝없이”) 쇠사슬로 목에 맷돌을 달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산꼭대기가 아니라 바다 속으로 영원이 침전한다니 방향이 정 반대이다. 실상 토끼는 그 전에 거북의 유혹에 속아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용궁이 아닌 차고 어두운 깊디깊은 물속으로 계속 빠질 뿐이다. 여기서 토끼는 “불쌍한 프로메테우스”가 되어 있다.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가 움친 “불”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구절로 돌아가게 된다. 어린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고 예수는 강력하게 꾸짖었다. 윤동주의 경우 “어린사람”은 순진무구했던 자기 자신이 아닐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던 그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한없이 절망하는 것은 아닐까? 불을 도적질 했다는 것은 불행한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한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몰래 “불장난”을 한 것, 다시 말하면 자기의 순진무구함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당시에 사면에 타오르던 친일의 불길에 순간적으로 솔깃했던 것, 그래서 그랬던 자신에 대한 한없는 자책의 늪으로 “침전하는”것을 암시하지 않을까?
잠시 습했던 그의 간은 이제는 아무리 말려도 채 마르지 않고 여윈 독수리가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고 이제는 온 몸 전체가 끝없이 절망 속에 빠져들어도 다함이 없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이 아니라 “안티프로메테우스” 곧 “반 영웅”이 되어 다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습하여 썩어 들어감을 절감한 자기의 “간”과 용기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이처럼 서로 정반대의 상징성을 지니지만 둘은 다 같이 “간”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서로 연결된다. 반 영웅과 영웅이 어쩔 수 없이 만난다. 토끼와 프로메테우스가 기이한 숙명으로 만난다. 이래서 그 두개의 간은 서로 완전한 파라독스를 이룬다. 이처럼 이 작품은 서로 충돌하는 여러 겹의 의미들이 매우 착찹하게 뒤엉킨 아이러니를 보인다.
윤동주는 이 시를 쓰기 9일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썼었다. 그는 과거에는 조그만치의 부끄러움도 용납할 수 없이 순진하였지만 그와 같은 절대 결벽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에는, 즉 온전한 시인이 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씩은 경험하듯 자신의 순진을 잃은 데 대한 회한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런 회환을 그는 「간」에서 얼버무리지 않고 용감하게 직면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혹에 솔깃한 겁 많고 약한 토끼이면서도 시적 양심에 있어서는 용감한 프로메테우스이었던 셈이다 『윤동주 자세히 읽기』, 이상섭, 한국문화사, 2007, pp.18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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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윤동주,   자화상,   ,   별 헤는 밤,   ,   ,   문학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2.09.09
  • 저작시기2009.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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