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고구려인물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연개소문(淵蓋蘇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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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 고구려인물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1.출생 및 가계
2.업적(광개토경을 중심으로)
1)북방경략의 웅지
2)남진정복의 성격- 국부민은과 통일의지의 구현
3.대외관계, 대외정책
4.광개토대왕에 대한 재평가



연개소문(淵蓋蘇文)

1.출생 및 가계
2.성씨에 관한 설
3.연개소문 정권
( 1 ) 연개소문의 대막리지 계승과정
( 2 ) 연개소문의 쿠데타
( 3 ) 연개소문의 집권 후 도교 도입
( 4 )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당태종
( 5 ) 연개소문의 귀족연립체제 모순 극복 가능성 여부
( 6 ) ≪삼국사기≫와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생각
4.대외관계
5.대외정책
◎참고자료(당에 대항하는 기세)
6.고구려 몰락
7.천리장성(千里長城)
( 1 ) 축성배경
( 2 ) 위치비정
( 3 ) 의의
8.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

본문내용

의 응함이라 했다. B) 고(구)려 고기를 보면,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612) 30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 왔으며 614년 영양왕이 국서를 보내 항복을 청했는데 그 때 한 사람이 몰래 품속에 조그만 활을 지니고 사신을 따라 양제가 한 배에 올라 양제가 국서를 읽을 때 그 활로 쏘아 가슴을 맞추었다. 양제가 회군하려 할 때 좌우에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소국을 정벌하다가 이(利)를 보지 못했으니 반대의 웃음거리라 했다. 이 때 우상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더니 양제가 죽은 뒤에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는데 15세에 총명했다. 그 때 무양왕(누군지 미상)이 그의 어집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는데 자칭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했다. 지위가 소문(蘇文)까지 이르렀는데 곧 시중 자리이다. 보았듯이 연개소문의 전생은 수나라의 양명이란 사람이였다는데 A)에 의하면 양명은 612년 수나라 양제의 요동 침공시에 비장이었고, B)에 의하면 614년 고구려가 항복을 청할 때 양명은 우상이었다고 하지만 같은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시기와 유언이 같기 때문이다. 죽어서 고구려에 대신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망하게 만들겠다고 나민 말이 같은 말이다.
자료 A)와 B)에 의하면, 고구려를 망하게 만든 인물은 연개소문인데 연개소문의 전생은 양명이므로 결국 고구려의 멸망은 양명이 전생기에 고구려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과 적개심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일연은 양명의 후생이 연개소문이라는 윤회전생을 소개했다기 보다 당나라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일깨우려는 일념에서 이를 다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명의 윤회문제는 당나라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갖고 있는 강한 증오심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고 본다.
이 같은 중국인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다 보니《삼국사기》역시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단정을 짓기에 이르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삼국사기》가 인용한 중국인의 기록과 《환단고기》는 연개소문의 성품, 인간성과 관련하여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당나라 정책과 관련하여《환단고기》는 그를 강경파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인의 기록은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즉,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건의했다는 점으로 보면 온건파에 속한 인물로 느끼게 하고 있으나 태종이 시해사건을 여러 차례 비난한 것으로 보면 강경파에 속한 인물로 보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나타내려 한 것은 연개소문이 독재자로서 국정을 전담하여 고구려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만 안겨주고 나라를 망친 악인이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을 강경파 인물이라고 보고있는《환단고기》는 영류왕을 친당적인 온건파라고 단정짓고 있다. 영류왕이 국왕이 되기 전에는 장군으로서 수나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고 즉위하면서 먼저의 왕들이 심혈을 기우린 강경노선을 따르지 않고 친당적인 태도로 나와 노자의 초상화를 들여다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듣게 만들었다하여 영류왕을 온건파의 우두머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 때부터 강경노선을 고집하여 도교의 강해를 폐지하고 심지어 장성축조 공사도 그만둘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군사권을 뺏고 대신 장성축조 공사 감독권을 맡겼다고 한다.《환단고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노선을 고수했다 하겠으나 중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강온파중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가리기 매우 힘들다. 그렇다해서 중간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처음에 온건노선을 지키다가 당나라 태종의 고의적인 트집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강경파로 급선회했다는 논리를 앞에서 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저의를 반영하고 있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종하다 보면 연개소문이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표현밖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고구려간사》p. 202
*참고문헌
1) 이주홍, 1983, ≪고대의 인물-한국인물사1≫, 양우당, p.p 99~112
2) 서병국, 1996,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학술발표회 발표문
3) 신형식, 2004, ≪고구려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p 302~329
4) 여호규, 1999,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푸른역사, p.p 15~30
태종의 쉴새없는 침략적 도발로 고구려가 인명과 물질면에서 큰 손실을 입어 국력의 소모가 컸던 것은 인정할 수 있으며 해마다 침공한 것은 고구려의 국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쉴 사이를 주지않고 계속 퍼분 공격으로 연개소문 집권시에 있었던 최악의 위기는 661년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연남생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의 방위망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십리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이듬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은 방효태가 거느린 당나라군을 청천강에서 섬멸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생존시 고구려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상시국을 맡게 된 인물은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었다. 아버지의 대권을 계승한 그는 막리지로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직접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등 동분서주했던 시기에 아들 삼형제 간에 대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의 모든 책임을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아들간의 내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들의 기록은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됨으로써 나타난 포악한 정치가 빚어낸 결과라고 마무리짓고 있으나 멸망원인은 중국인이 강조하고 있듯이 연개소문과 그 집안사람들의 국정 운영이 잘못되었다는 데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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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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