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제5장.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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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교개혁사-제5장.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빵}}}}성례는 하나의 유비이다. 인간의 몸이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활기를 얻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유비 관계에 있다. 만약에 화체 설을 주장하면 빵이 더 이상 빵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체설은 이 유비를 깨뜨린다고 보았다.㉢ 성찬론칼빈의 성찬론은 영적 임재설이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우리를 성령께서 연결시켜서 우리와 그리스도가 결합하게 한다. 이것을 표시로 보여주는 것이 성찬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나타났다. 비둘기는 성령이 아니라, 성령이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 알 수 없는 사실을 볼 수 있게 하기위해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칼빈의 공간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공간관과는 차이가 있다. 칼빈의 공간관은 차원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없이 멀고, 한편으로는 한없이 가까운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없이 멀다는 것이 차원으로 먼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20장에서는 시민통치를 다루고 있다. 4. 칼빈의 정치사상대체로 19-20세기 초까지 학자들은 칼빈을 근대 민주주의의 어머니로 보았다. 왜냐하면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 등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에 Cheneviere라는 사람이 [칼빈의 정치사상]에서 칼빈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군주제를 인정하고 민중저항권을 부정한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자신이 속한 나라에서 박해받는 소수이기에 종교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 것은 인정하지만 칼빈과 칼빈주의자는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Mcneill은 이것을 다시 비판했다. 칼빈은 근대민주주의의어머니이다. 우선 칼빈은 국가 형태(군주政, 귀족政, 민주政)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귀족政과 민주 政이 혼합된 것으로 보았다. 민중이 최선의 사람들을 뽑아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정치하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대의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해서 서로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권력분립설과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신정정치를 주장하지 않았다. 저항권 문제에 대해서 권세는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에 관리는 하나님 뜻대로 다스려야하고 민중들은 관리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관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않았을 때에는 일반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독재는 백성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로 주시는 것이라고 칼빈은 생각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해방자를 보내서 독재자를 처벌한다. 구조로 봐서는 독재자 밑에 해방자가 있는 것이지만 해방자를 하나님께서 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에 있는 권세가 아래에 있는 권세를 처벌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두번째로는 어떤 욕망을 가진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백성의 관리 말하자면 의회가 독재자에 대해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독재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전쟁에 있어서는 정당한 전쟁을 주장했다. 목적과 과정이 정당해야 한다고 보았다.5. 칼빈의 경제사상막스 베버는 직업소명설, 예정설이 자본주의 발달에 공헌했다고 보고 있다.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라' 이것은 근면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했다는 예정설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과연 내가 어떻게 예정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대답은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삶은 가능한 한 절약하고 검소한 삶이다. 근면, 검소에서 자본이 축적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에른스트 트뢸치는 하나를 더 보태는데 칼빈은 노동과 유익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기독교 사회주의로 발달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Beler는 칼빈의 {경제 사회 사상}에서 칼빈의 경제사상은 인격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각자로부터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것이 인격적 사회주의이다.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Graham은 제네바가 복지국가였다고 보았다. 제네바의 이상은 기독교 사회주의였다는 것이다. {건설적인 국민과 칼빈}이 graham의 책이다. 이 양호 교수님은 빈에게는 자본주의적 인 면과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칼빈은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아니면 힘있는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의 편재도 인정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상공업을 인정했다. 이자받는 것에 대해서 '돈에는 증식성이 없다.'는 것을 부정했다.돈의 유통과정에 서 증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주장했다. (☞ 칼빈이 practical syllogism(실천적 삼단 논법)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정 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산다. 김 씨는 거룩하게 산다. 그러므로 김 씨는 구원받았다. 이것이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공헌했다. 동시에 칼빈은 사랑의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부의 편재를 주장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는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테스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부의 편재의 목적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고 하였다. 칼빈은 기금에 의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금을 가능한한 늘려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사봉급은 국가가 주어서 가난한 아동들도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기의 능력껏 벌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는 사회가 칼빈이 생각한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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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5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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