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을 위한 조직신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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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사들을 위한 조직신학 개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교사들을 위한 조직신학 개론 (1)

1. 반드시 신학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일반 신앙인들은 신학에 대하여, 특별히 조직신학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다음의 가상적 이야기를 들어보자.
로마 교황청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확정하기 위하여 신부들의 모임을 소집하였다. 그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는 칼 라너라는 신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신학자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한 사람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모임을 가지던 중간에 서로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회의를 주재하던 사회자는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함께 회의에 참석하던 신부들에게 각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한 뒤에 다시 모여서 회의를 계속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거기에 참석한 모든 신부들은 각자 자신의 기도처소로 들어갔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부분의 신부들은 20분 정도 기도한 후에 뛰쳐나오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직 신학자 라너만은 아직도 그의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의 박식한 신학자 라너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올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시간이 한 30분 쯤 더 경과한 뒤에 라너의 기도실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는데, 뛰쳐나온 분은 라너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를 흔들면서 말씀하시길, "라너의 말이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신학이란 이와 같이 전적으로 문제투성이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이해될 만한 일이다. 신학의 사변성에 좌절을 느낀 사람들은 말한다: "신학의 쓸모없는 논쟁을 다 던져버리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신학이 아니라 단순한 신앙이다." 필자 자신도 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 겪었던 좌절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신앙의 단순함과는 반대로 신학은 왜 그리 복잡하고 난해하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가의 물음이 나를 괴롭혔다. 특별히 조직신학이라 불리는 신학의 한 분과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학문의 표지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누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겠는가? 단순하게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 우리는 신학을 필요로 하는가? 특별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신학이 필요한 것인가?


신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먼저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자임을 인식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신학이 이해를 추구하여 자신이 신앙하는 것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신앙인은 이미 신학자이다. 자신이 그것을 알건 모르건 간에, 신앙인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전수받은 신앙과 하나님 이해는 이미 어느 특정한 신학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신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던 위의 질문들도 실상은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으로부터 나온 질문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위의 질문들은 신앙을 연구하는 신학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경우에는 신앙주의(fideism)라고 하는]을 전제하는 가운데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신학을 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다. 참된 과제는 '어떠한 신학자가 될 것인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모두가 신학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좋은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2. 신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이 신학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안셀름(Anselm)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신학이란 일차적으로 전통적인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거나 전통적인 신학의 주장들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과정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충만한 진리를 질문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탐구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다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속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아무런 전제 없이 시작하는 학문이 아니다. 신학에는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 이 출발점은 인간의 사고나 경험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현실(Reality)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신앙으로 응답하는 가운데 신학의 순례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언제나 신앙의 학문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면서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 신학의 출발점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해진다. 만약에 이 계시의 현실(Reality)이 없거나 부정된다면,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의 종교적 소원을 기술하는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째, 우리 안에서 신앙적 사고, 곧 신학을 불러 일으킨 진리는 "충만한 진리"이다. 우리가 신학하는 가운데 대면하는 진리는 한정된 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충만한 진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우리 인간의 지적인 소유물로 갇힐 수 없는 진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은 언제나 자신의 출발점을 기억함으로써만 참으로 신학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현실로부터 출발할 때, 신학은 인간학에 머물지 아니하고 참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셋째, 신학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며, 비록 잠정적일지라도 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신학은 삶의 진지한 질문들에 대해 미리 만들어진 답들을 다 포장하여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과 자신의 세계가 스스로에게 결코 던지지 못했을 질문들을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던져준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질문의 책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창 4: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9)] 그러므로 신학은 사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하여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진리 탐구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자세나 진리를 완전히 소유한 듯이 말하는 교만한 주장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신앙주의(fideism)와는 다른 것이다. 신앙주의는 우리가 우리의 질문과 사고를 멈추고 그저 믿기만 해야 함을 강조하는 반면에, 참된 신앙과 신학은 계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탐구하는 가운데 진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라는 표현을 강조해야 한다. 신학은 단 한번의 시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학하는 사람은 어제의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는 없다. 이것은 신학하는 것이 늘 새로운 이야기만을 다루어야 함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제의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지양되어야 한다면,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역시 거절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의 질문들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신학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성급한 종말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고전 13:12) 하지만 아직 종말이 임하지 않았음으로 우리는 진리의 부분들만을 경험할 뿐이다. 비록 우리의 구원에는 충분한 진리이지만, 우리가 탐구하고 소유한 진리가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가운데 독선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신학에 대한 개략적 소개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은 이전에 전개되었던 '신학들'(Theologie)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학하기'(theologieren)를 배워야 한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보다 나은 신학을 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하나님 이해를 넘어서서 보다 전체적인 이해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의 질문들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신학하기를 배워야 할 필요성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신학의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탐구해야 할 첫번째 필요성은 기독교 신앙이 언제나 새로운 상황(situation)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진공 상태 안에서 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자신의 문제들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 안에서 산다.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히 13:8),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언제나 변화하는 가운데 있으며 모호한 상황 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와 상황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야만 하기에, 어제의 신학적 작업들이 언제나 삶의 적합성(relevance)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변화된 이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어제의 답변들이 오늘에는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외면할 수 없는 도전들을 던져주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오늘도 새로운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며 이해를 추구한다.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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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찬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나누어짐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주의 성찬은 하나님의 삶이 인간의 삶에 나눠짐을 뜻하는 성례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자신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의 삶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교제의 삶 가운데 참여한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또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해하는 가운데 종말론적인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볼 때, 세례는 또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구원의 완성을 고대하며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연대를 이룬다. 성찬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희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한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세계 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 가운데 참여한다.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것이기에, 신앙인은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가운데 이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영적으로, 또한 육신적으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자각한다. 또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자연의 곡물과 열매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성찬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동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지시한다. 인간 뿐 아니라 자연도 역시 그리스도의 현존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사역 가운데 봉사한다. 그러므로, 밀리오리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주의 성찬은 개인적 구원, 공동체의 구원, 그리고 우주적 구원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아름답게 묘사해준다."
이제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종말론의 주제들은 비록 조직신학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나, 종말론의 시각은 모든 기독교 진술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을 떠나서는 모든 기독교 교리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이해하지 않고 마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듯이 간주한다면, 우리의 교회이해와 성만찬 이해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이해와 성례전 이해를 전개함에 있어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의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희망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죄와 악과 죽음의 세계는 모두 정복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피조물의 세계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완성을 모두 포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개인의 삶이 완성되며 영화롭게 됨을 뜻하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개인적인 완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의 차원에도 적용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을 향한다. 즉 인간과 그의 세계 뿐 아니라 자연 및 모든 우주가 영생으로 표상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한다.
영생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충만한 삶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영생이 하나님의 충만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천국에서의 삶은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지루한 삶의 연장을 뜻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천국에서 실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활동적으로 일하게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 맛보는 것과 같은 무익하고 지루한 일은 사라질 것이나 우리의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들은 계속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고독한 영혼으로서 지루하게 무한정 오래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온갖 종류의 축복을 맛보게 된다. 우리가 종말에 맛보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또한 영혼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새 하늘' 뿐 아니라 '새 땅'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영혼들만의 교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삶과 교제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다스리심에 의하여 성취되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업적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이해하는 것은 이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세계로부터 도피함을 뜻하지 않는다. 기도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참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듯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희망하는 것은 현재의 과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중요한 과제가 자신들에게 부과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간만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게 하는 작은 희망들의 실현을 위해 애써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 가운데 이 땅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오늘의 세계를 향한 윤리적 도전을 우리에게 던져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Gabe)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에 과제(Aufgabe)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펼쳐가는 종말론적 희망은 인간의 실천적 행동을 마비시키는 도피적이며 피안적인 공상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에 불을 붙이는 참여적이며 구체적인 비젼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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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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