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경학사상과 생태환경 위기의 현대에 주는 시사점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정약용의 경학사상과 생태환경 위기의 현대에 주는 시사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정약용의 생애
2. 정약용의 정치사상, 민본주의
3. 정약용의 과학관
4. 정약용의 경학사상
5. 생태환경 위기의 현대에 주는 시사점
1)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2) 경세학,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3) 상업·공업 정책론
6. 정약용의 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그 계승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차원의 광업제도 운영방안으로서 광업 행정지침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광업개혁론은 당시 발달한 덕대제 광업 경영의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상공인을 보호하고, 당시 사회의 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던 상공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상공업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공발매정책을 지지하면서 상업세의 증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광산국영이 요청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그의 상공업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유식자(遊食者)를 정리하여 개직(皆職)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6. 정약용의 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그 계승
산의 민본주의는 사상적으로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만하다. 정약용의 국가사회통치자법률의 형성에 대한 사회계약적 사고방식은 서구계몽사상의 사회계약적 사상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해져있던 당시 조선사회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쇼킹한 것이다. 그의 저서〈技藝論〉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회를 기본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주례를 ‘가탁’ 한 것은 서유럽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진보적 사상가들이 인본주의를 모색함에 있어서 고전 시대를 ‘가탁’하여 그들의 주장을 고대의 재생(르네상스 renaissance)이라고 가탁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다.
의 신민본주의 사상에는 두 개의 차원의 중요한 민주제가 암중모색되고 있었다고 관찰된다. 그 하나는 이정(里正또는里長)을 대표로 하는 백성들의 직접민주제이다. 그는 모든 개혁론에서 5가의 인장(隣長)과 25가의 이정은 언제나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입론하고 있다. 25가는 바로 ‘마을’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마을의 백성들이 직접 선거하여 뽑은 인장이 진정한 백성의 대표인 것이다. 그는 법률도 이들 이장들이 제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의 신민본주의 사상에는 이와 같이 이정이 핵심적 위치에 있으며, 이정 선출까지가 직접민주제의 요소를 가진 것이다. 한 이러한 이정까지의 직접민주제는 당연히 지방자치제를 전제한 것이었다. 또 그의 민본주의 사상은 지방자치제를 전제한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정부터 그 위의 당정주장군주는 이정이 단위가 되어 뽑는 간접민주제의 요소를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인구의 다수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정부터는 간접민주제에 의거하여 최종적으로 군주의 선출에 이르는 입헌군주제의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정약용의 민본사상은 당시 주류로 자리 잡고 있던 천자천명설과 왕권신수설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천자황왕은 백성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상향하여 민중의 추대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보는 백성에 의한 새로운 상향식의 신민본주의 사상인 것이며 이러한 추대를 ‘순(順)’이라 규정하고, 당시 지배하고 있으면서 ‘順’이라고 강조되고 있던 제도인 천자군주에 의한 하향식의 제후관리(諸侯官吏)의 임명을 도리어 ‘역(逆)’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아직 유교 사상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으로부터 황왕에 이르기까지의 상향식 추대단계가 백성을 근본으로 하여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가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정약용의 민본주의 사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백성의 대표에 의한 법률의 제정’을 승인하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의 민주주의의 이념과 같은 맥락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적 전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정약용의 민본주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등 사상의 맹아는 확립했으나, 그것을 제도화하는 수준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이러한 민본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는 당시의 동양 사회 정치사상에서는 이례적인 새로운 것이었으며 획기적인 중요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를 정립해 두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 자본주의 침입에 당하여 서양에서 먼저 발전한 민주주의 사상이 ‘제도’를 알게 되고, ‘맹아’와 ‘제도’를 결합시켜 한국에서의 전제군주제의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운동과 입헌민주제 사상 및 운동이 대두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Ⅲ. 결론
다산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천주교에 경도되기도 하면서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경험과 고난의 길을 통과하면서 끝내 자신만의 독특하고 방대한 학문과 사상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들은 오늘날 ‘다산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학문의 바탕에 무엇보다도 가난과 억압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당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면면히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은 ‘기민시’를 보면 그러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의 백성에 대한 연민과 그 이상으로 민본주의에 입각한 사회 제 분야의 개혁노력과 그의 청렴한 삶의 실천은 오늘날에도 위정자들과 모든 후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행한 연구와 업적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위대성은 백성을 제일로 생각한 민본주의 사상과 몸소 청렴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실천적 자세, 이에 입각한 정치, 경제사상에 대한 학문적 탐구와 저술의 열정, 실학적 개혁사상들의 실현을 위한 노력들, 반대파의 탄압에도 초연한 자세와 반대파의 학문까지도 포용하는 자세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곧 다산이 우리에게 물려준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참고문헌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4.
금장태, 다산 정약용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 살림출판사, 2006
장시광 편역, 목민심서, 타임기획, 2005.
이광웅, 정약용과 목민심서 , 예림당, 2003
박석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01
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3

키워드

  • 가격20,0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1362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