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문공연장화][예술과 서비스][정동극장][원각사]극장과 역사, 극장의 무대계획, 극장의 전문공연장화, 극장의 예술과 서비스, 극장의 성공 사례(정동극장),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극장 관련 제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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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극장][전문공연장화][예술과 서비스][정동극장][원각사]극장과 역사, 극장의 무대계획, 극장의 전문공연장화, 극장의 예술과 서비스, 극장의 성공 사례(정동극장),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극장 관련 제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극장과 역사

Ⅲ. 극장의 무대계획

Ⅳ. 극장의 전문공연장화
1. 국립극장
2. 예술의 전당
3. 국립국악원

Ⅴ. 극장의 예술과 서비스

Ⅵ. 극장의 성공 사례(정동극장)
1. 운영체재의 변화
2. 전문공연장화 전략
3. 프로그램의 다양화
1) 관객 중심의 다양한 아이디어 공연 프로그램
2) 문화 시음회
4. 적극적인 서비스 마케팅 전략
5. 부대시설 변화
6.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
7. 타 문화공간으로부터의 벤치마킹사례

Ⅶ.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Ⅷ.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장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 인기 있는 공연장으로 알려졌으며, 극장 수입도 95년 9천만 원, 96년 3억 2천만 원, 현재 16억 9천만 원으로 95년 대비 약 19배로 대폭 증가하였으며, 공연수입을 통한 극장의 자립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결과 타 문화공간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벤치마킹의 주요 사례가 되고 있다.
Ⅶ.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1950년대는 연극을 할 수 있는 극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57년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이 함께 쓰고 있던 시공관뿐이었다. 국립극장은 불안정한 운영 속에서도 전속극단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에 62년까지는 소극장운동 단체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소극장운동의 대표적 존재였던 제작극회만 해도 원각사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문리대학 강당이나 가톨릭 회관과 같은 곳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동인들의 조직체였던 소극장운동 단체들은 예외 없이 경제적 난관을 겪고 있었으므로 영화관을 대관하여 공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연극인들은 소극장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인식하고 소극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국 연극사에서 최초로 생긴 소극장은 정부에서 지은 원각사였다. 원각사는 본래 을지로 입구에 있던 일제시대의 건물을 해방 후, 경춘철도 사무실로 쓰다가 625 이후에 헌병사령부에서 접수하여 식당 겸 강당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을 58년 당시 공보부(公報部) 실장으로 재직 중이던 오재경(吳在璟)의 주도 아래 인수하여 극장으로 개조했던 것이다. 원각사 설립은 공보실에서 정부수립 10주년 사업의 하나로서 추진한 것이었고 그 운영은 공보부 선전과 사무관으로 있었던 김창구(金昌九)가 맡게 되었다. 설립 목적은 고유의 민속예술을 보존 발전시키고 이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원각사 설립의 본래 취지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예술의 상연장으로서의 성격에 있었기 때문에 주된 관객층을 외국인들로 선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극장의 외관에서부터 내부 장식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지어졌다. 원각사가 공보실이 주관 운영하는 정부재산의 극장이었고 당시 전통예술을 위한 극장이나 문화가 형성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개관공연은 1958년 12월 22일부터 1959년 1월 10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국악과 고전무용이 중심이 되어 민요, 창극과 같은 전통예술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그리고 KBS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서울방송관현악단, KBS합창단 등의 음악프로가 세계 예술의 흐름과 같이 하는 우리 예술을 보여줌으로써 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개관 예술제는 외국인들에게 민족예술의 정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화와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하게 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극은 신협이 유치진 작 <소>(3막)를 이광래 연출로 공연했을 뿐이어서 전통예술의 보존과 발전이라는 설립 취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래층 217석, 위층 89석으로 총 306석인 소극장은 무대가 없는 극계에도 대단히 소중한 존재였고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50년대 후반의 극계는 기성극계의 부진 속에서 소극장운동에 의한 연극부흥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무대가 없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연극 실험은 소극장이 있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지만 경제력이 없는 연극인들로서는 도저히 소극장 설립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연극인들은 원각사가 소극장운동의 개화와 한국 연극의 질적 향상의 원동력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의 친밀감을 조성할 수 있었고 더구나 무료 대관이었기 때문에 소극장운동단체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장소였다.
원각사는 금토일 3일간은 계획에 의한 본격적 프로로 개관취지에 입각한 움직임을 취할 것이며 화수목 3일간은 국내 일반 예술인들의 문화활동(연극, 무용, 합창, 연주 등)에 자유로운 활용을 허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59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원각사는 외국인들을 위해 지어진 극장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원각사를 이용하려는 예술단체들도 그리 많지 않았고 관객들도 쉽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문지상에서는 원각사가 소극장으로서 갖는 효용을 설명하면서 공연단체나 관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극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Ⅷ. 결론 및 제언
현대사회에서 공연장의 역할은 어느 때 보다도 더욱 크다면 역설적으로 들질 지도 모르겠다. 공연예술이 집단대중을 만날 수 없고, 그 특성상 산업화되기 어렵기에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기는커녕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개인적인 공간에서 삶이 운영되고, 시장경제가 사회의 구도로 자리 잡은 시대를 맞았기에 공연예술의 전망은 어느 때 보다도 불투명하지만 ‘인간’ 중심의 ‘공동체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서 공연예술의 역할이 더욱 클 수밖에 없어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심한 괴리를 실감한다.
서양의 경우를 봐도 극장 중심의 연극이 세계 연극사에서 입장 수입만으로 존립, 발전되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때가 있었더라도 그 시대에는 다른 여가선용의 방법이 없었고 오히려 흥행에 성공한 통속극의 폐해가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예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더욱 강하였던 기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공연예술은 결국 예술가 개인이나 어떤 예술집단의 자생력에 의존할 수도,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하여 사업적으로 키워나갈 수만도 없는 문화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어 국가나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을 맡아 이 예술분야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리 잡고 발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참고문헌
◈ 백현미(1995), 원각사의 설립과정과 연극사적 성격, 판소리학회
◈ 백순재(1975), 원각사 극장 연구, 중앙대학교
◈ 에이기세이 저, 김의경 역(2008), 살아 숨쉬는 극장, 연극과인간
◈ 유민영(2004), 정동극장 이야기, 태학사
◈ 윤용준(2012),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의 현황과 발전방안, 한국예술경영학회
◈ 임채진 외 2명(2011), 전문공연장의 특성에 대한 연구 : 태권도 공연장을 중심으로, 한국문화공간건축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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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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