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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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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시가(시가문학)와 삼국시대시가

Ⅱ. 시가(시가문학)와 고려시대시가

Ⅲ. 시가(시가문학)와 조선시대시가

Ⅳ. 시가(시가문학)와 고전시가

Ⅴ. 시가(시가문학)와 근대시가

Ⅵ. 시가(시가문학)와 사대부시가

Ⅶ. 시가(시가문학)와 국문시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는 바로 이를 한시 양식으로 한역하는 일이 관행을 이루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 문학사에서 국문시가의 한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원천적인 배경은 우선 이원적인 언어문자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말로 된 문학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지식계층은 동아시아의 보편문자 역할을 하였던 한문으로 문학창작을 계속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문시가와 한시는 부단히 교섭하면서 표기체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고 양식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길이 모색되었으며 그러한 방안의 하나로 향가와 고려의 속악가사를 한시 양식으로 번역한 작품이 나타났다. 이처럼 우리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 국문시가를 문자로 기록하려면 향찰표기 외에는 한시 양식으로 번역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글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사대부 문인들의 문자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문자는 한자를 의미했으며 여전히 한문으로 문학활동을 하였고 대표적 문학양식으로서의 한시의 위치도 변함이 없었다. 국문시가를 직접 짓거나 그 가치를 역설한 인물도 대부분 한문학 양식으로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국문시가를 문자로서 정착하기 위한 한역 작업 계속된 것이다.
다음에는 시가 한역의 배경으로 국문시가의 전개에 따른 문제를 들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시조와 가사문학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잡가도 널리 유행하였다. 시조의 경우 10여 수에서 100여 수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작품을 지은 작자들이 나타났는데 송순, 신흠, 이정환, 남극엽, 안창후, 조황 등과 같이 자기의 작품을 한역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국문시가를 짓고 동시에 이를 한시형태로 번역하는 일이 관행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덕일의 <우국가> 28수, 이이의 <고산구곡가> 10수, 정철의 <훈민가> 16수 등과 같이 특정 주제 아래 연작형으로 지어진 작품들은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아서 거듭해서 한역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오면 시조가 민간에 널리 유행되었고 이들을 수집 정리한 가집의 편찬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가집을 통한 시조의 수집은 주로 중인 이하 가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사대부 문인들은 민간에 유행하는 시조를 수집하여 한시 형태로 번역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시조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그것을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한역한 것이다. 가사의 경우는 시조만큼 연행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작품이 장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번역하려면 단형시 형태보다는 장편시를 이루어야 하므로 시조만큼 널리 한역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철의 작품은 널리 유행되어 여러 사람에 의해 거듭 한역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민요와 잡가의 한역도 나타나고 시조와 민요와 잡가가 서로 넘나드는 상황에서 이들의 한역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한시의 사적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한시를 짓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 성률에 정통하기 어려웠고 중국적 전고와 미의식으로 우리의 정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웠다. 이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하여 고유의 소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른바 ‘조선시’ 추구의 흐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주로 우리의 역사, 풍속, 가요 등에서 소재를 취하여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우리 고유의 정서와 미의식을 담아낸 악부시의 창작으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시단의 흐름 속에서 많은 국문시가 작품을 직접 한역하여 연작형의 작품을 이루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문학사적 배경이 한역시가 출현의 배경이 되었는데 여기에 직접 국문시가를 한역한 인물들의 성향은 한역시가 출현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을 담당하거나 산림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문학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양반사대부들이었다. 전형적인 사대부 문인들의 국문시가 한역은 국문문학과 민족 고유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재로 <關東別曲>을 한역한 金萬重은 국문문학의 가치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가졌던 인물로 <三藏>, <蛇龍> 등을 부연하여 악부를 지은 바 있고, <思美人曲> <續美人曲>을 한역한 金相肅은 <海東俚謠>라는 이름으로 민요를 수집 한역하였다. 77수의 시조한역가를 남긴 李衡祥은 악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혜안으로 악학의 원류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수록작품이 가장 많은 <甁窩歌曲集>을 편찬하였고 洪良浩는 민요와 국문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洪州風謠>, <朔方風謠>, <北塞雜謠> 등의 작품과 함께 한역시가<靑丘短曲>을 지었으며 馬聖麟은 <短歌解>외에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을 다룬 <弄題俗談>14수를 지었고 權用正도 <東謳>외에 <歲時雜詠>를 지었다. 그리고 申緯는 <小樂府> 외에 <觀劇絶句十二首>, <觀梨園樂舞五首> 등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서민예술과 우리의 노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李裕元 역시 <小樂府> 외에 <海東樂府>, <補題散樂>, <俗樂十六歌詞>, <觀劇八令>, <靈山先聲> 등 여러 이름의 악부를 지어서 특히 우리나라의 음악과 민속예술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렇게 국문문학과 민속예술에 관심이 많고 하층민의 생활과 문화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사대부들은 국문시가의 가치를 인식하고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향수의 일환으로 이를 한역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이원적 언어문자체계 아래 문학활동을 해왔던 국문학사의 특수한 전통에서 국문시가와 한시의 사적 전개 과정을 통하여 양자가 서로 관련되면서 국문시가에 관심을 가진 사대부 문인의 손을 거쳐 한역시가 작품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학성, 고려시대 시가의 장르현상,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3
류해춘, 고전시가와 대중문화의 공감과 소통, 우리문학회, 2012
신창호 외 1명, 삼국유사에 수록된 시가와 배경설화의 교육적 의미, 한국교육사학회, 2011
신영명, 문학사서술의 방법과 사대부시가의 사적 전개, 고려대학교국어국문학연구회, 1992
정연길, 한국 근대 시가의 변이·기타, 한성대학교, 1992
조해숙, 근대전환기 국문시가의 장르적 변환과 근대성,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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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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