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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건국신화][상징체계][신성원리][동명신화][시조신화]건국신화와 상징체계, 건국신화와 신성원리, 건국신화와 구성원리, 건국신화와 동명신화,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건국신화와 무속신화, 건국신화와 고려세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건국신화와 상징체계

Ⅲ. 건국신화와 신성원리

Ⅳ. 건국신화와 구성원리

Ⅴ. 건국신화와 동명신화

Ⅵ.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1. 우리 신화는 늘 만주나 시베리아, 즉 동북아시아라는 확대경 속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
2. 씨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시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설명하는 인류(남녀)기원 신화와의 공통기반을 전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
3. 이와 같은 인식 하에서 건국신화 내지는 건국담이 역사적 인물과 결합되고 실체적 국가와 연결되더라도, 이에 대한 역사 실증주의적 해석의욕을 잠시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Ⅶ. 건국신화와 무속신화

Ⅷ. 건국신화와 고려세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은 이 유가적 합리주의에 와서 결정적인 한계에 봉착한 셈이다.
고려세계의 서두를 보면 태조 즉위 2년에 曾祖父를 始祖로 하여 父까지 3대를 追封했다는 태조실록(현종대1009-1031에 찬술)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세계는 다만 그런 사실과 계보만을 언급하고는 바로 편년통록의 건국신화를 거론하고 있다. 이런 편집방식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태조실록은 편년통록과는 달리, 그야말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고려 초에는 건국세력이 공식적인 차원에서 건국의 신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고대국가의 건국과는 달리 이 시기는 건국신화가 당위로 요청되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화적 언어관에 대한 의심과 부정은 더 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시대에는 이미 11세기의 태조실록에서 12세기의 삼국사기(1145)로 이어지고 고려세계에 인용된 왕대종족기나 성원록으로, 그리고 이제현 등의 유가적 지식인들로 이어지는 탈신화적 역사인식의 맥락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반대쪽에는 전대의 신화적 언어관을 이은 편년통록에서 동명왕편(1193)이나 삼국유사(1285)제왕운기(1287)편년강목 등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역사인식이라는 또 하나의 맥락이 흐르고 있었다. 고려세계는 조선 초기(1451) 유가 지식인들에 의해 재편집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두 흐름의 충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고려건국신화의 제작자라 할 수 있는 김관의는 충돌하는 두 흐름의 한 쪽을 타고 있었다. 그가 편년통록을 편찬한 내력에 관한 정보는 고려세계 말미에 붙은 사신들의 史論 서두의 “옛 서적을 참고해 보면 同知樞密 兵部尙書 金永夫와 徵仕郞 檢校軍器監 金寬毅는 모두 의종 왕조의 신하이다. 관의가 지은 편년통록을 영부가 검열하여 올렸는데 그 箚子에도 역시 관의가 여러 집에서 개인적으로 간직해온 문서들을 찾아 모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이 기록만을 가지고는 미관말직에 있었던 김관의가 왜 ‘訪集’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이런 류의 왕실세계를 편찬했는지를 추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王代宗錄을 편찬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리라고 생각되는 김관의를 요직에 있었던 김영부와 연결시키면 편년통록의 편찬동기가, 전대의 건국신화들이 그러했듯이, 의종과 왕실의 신성과 위엄을 현시하는 작업의 일환이었으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김영부가 병부상서로 재임했던 기간은 1162.12~1164.6월이므로 편년통록은 분명 이 시기에 편찬되어 진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을 참고로 하면 이 시기에는 오랜 가뭄이 지속되어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벌어진 무신란의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정치적 위기도 고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의종은 “酷信術士”하여 허황된 꿈 이야기나 하면서 주색에 빠져 있었다. 이런 의종에게 올려진 편년통록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는 명약관화하다. 당면한 정치적 위기의식을 왕실의 신성과 위엄을 현시하는 신비적, 환상적 언어의 현실구성력을 통해 해결해 보려고 했던 의종과 귀족권력에게 고려건국신화는 주색과 다르지 않은 일종의 ‘위안의 문학’이었을 것이다. 이는 편년통록을 진상한 후 김영부의 벼슬이 정2품인 中書侍郞同平章事(1164.6.)로 올라간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신화적 언어란 권력과 접속할 때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언어로 빛깔을 바꾸는 것이지만 권력의 현실구성력이 무력한 상황에서는 지시적 언어의 현실구성력이 ‘위안’ 이상의 의미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신성과 위엄을 드러내려고 하면서도 왜 편년통록은 단군신화나 동명왕신화가 보여주는 천자 강림의 화려함과 지고신의 절대적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 용왕과 같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신성과 풍수지리설 등의 지상적 권위에 기대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건국신화 구성주체들의 ‘시선의 이동’이라는 답변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 시선의 이동이라는 문제를 ‘논쟁’이라는 조명에 다시 비추어 보면, 김관의 등의 신화적 언어관의 계보에서 빚어진 시선의 이동은 이제현 등의 탈신화적 언어관의 시선을 부분적으로 의식한 결과이기도 했으리라고 판단된다.
편년통록은 김관의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고려세계를 참조하면 ‘諸家私畜文書’를 채집하여 그것을 근거로 편술한 것이므로 이런 시선의 이동은 김관의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방문했던 ‘諸家’의 家는 문서를 기록하고 소장할 능력을 지녔을 상층귀족가문이었을 터이고, 적어도 김관의가 참고했을 자료라면 고려건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거나 신라 하대의 지방호족이었던 왕건 가문의 선대 인물들과 관련된 전설적 성격의 가전자료였을 터이니 시선의 이동은 이미 이들의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관의는 이 사축문서들을 중개자 기능의 확장과 풍수지리설 등의 새로운 서사구성원리에 의해 재구성한 것인 셈인데 재구성하면서 이동된 시선을 무가 군웅본풀이와는 달리 고대적 건국서사로 되돌리지 못한 것은 탈신화적 언어관의 시선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세계가 새로이 동원한 풍수지리설 등의 해석학적 사유와 서사구성원리는 신화적 언어관에 대한 당대의 의문과 부정에 대한 하나의 담론적 우회로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스스로가 신화적 언어이면서도 합리적 사유, 탈신화적 언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여 탈신화적 사유에 대응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고려건국신화를 통어하고 있었던 해석학적 사유는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언어였던 셈이다.
참고문헌
박승범(2009), 부여국의 신화적 변동과 동명신화의 시·공간적 추이, 고려사학회
서해숙(2009), 성씨시조신화의 전승과 분포 그리고 문화권역, 남도민속학회
신동흔(2010), 무속신화를 통해 본 한국적 신 관념의 단면, 비교민속학회
서철원(2010), 건국신화의 여신 형상과 그 문화사적 의미, 한민족문화학회
오세정(2004), 상징과 신화 : 신화 형성화와 의미화의 상징적 논리, 시학과 언어학회
조현설(2000), 고려건국신화 고려세계의 신화사적 의미, 한국고전여성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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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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