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술> 우리나라 술의 역사와 이해 (술의 어원, 술의 기원, 누룩, 술의 종류, 금주령, 주세령,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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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술> 우리나라 술의 역사와 이해 (술의 어원, 술의 기원, 누룩, 술의 종류, 금주령, 주세령, 주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술의 어원

2. 술의 기원

3. 누룩

4. 술의 종류

5. 금주령

6. 주세령

7. 주막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 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다양해진 주점형태.
영조 초기에는 술 파는 계집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주모가 있어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일반인을 상대로 방에서 술을 팔았다는데 이러한 것을 매주가라고 하고, 그 후 손님과 주인이 내외하는 주점이 출현하였다. 내외술집은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의 가정집이지만 대문 옆에 '내외주가'라고 써서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둘러 붙여두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외술집임을 알아 차렸다.
내외술집은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넛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술을 파는 집을 일컫는데 술장사는 할지라도 예의는 지키면서 술을 팔았다. 술은 가양주에 안주로는 탕·묵·편육 등을 준비해 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특이한 것은 술을 잔 수로 계산하지 않고 주전자수로 계산하는데 손님은 세 주전자 값을 지불한다. 이는 내외술집의 수지를 맞춰주려는 따뜻한 인정으로 한 주전자를 마셔도 꼭 세 주전자 값을 지불하였다. 또한 안주인 여자는 외간 남자와 서로 대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므로 안에서 술상만 차려 놓으면 그 집 종이 술심부름을 했다. 술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없는 집에서는 마치 중간에 전하는 사람이 있는 듯이 남녀가 대화를 했다. 그래서 내외술집이란 명칭도 내외의 분별을 하면서 술을 파는 집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흔히 내외술집을 "팔뚝집"이라고 부른다. 이는 팔뚝만 오고가는 술집에서 유래된 말인 듯하다.
- 마지막 주막
100년 풍상 버텨온 예천 ‘삼강주막’
주모는 갔어도 취흥(醉興)은 남아…
숫자 못 읽는 주모, 벽에 금 그어 외상 표시…
경상북도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복원키로
벌써 100여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 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조선의 마지막 주막’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라면서 “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삼강리’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그은’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씨는 “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며 “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줄지 말이오.
영리한 인류는 술의 발생 비밀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 신비의 음료를 제조하게 되었고, 이 쓴 맛의 액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역사에 놀라운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 또한 무수한 세월이 흘렀으나 기본적인 양조기술과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까닭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정대성 저 우리 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혜, 이회문화사 2006
정동효 저, 우리나라 술의 발달사, 신광출판사 2004
조정형 저, 다시 찾아야할 우리의 술, 서해문집 2010
이종기 저, 술 이야기, 다할미디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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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01
  • 저작시기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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