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자신의 전공에서 바라 본 세종 시대와 그 정치에 대한 이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자신의 전공에서 바라 본 세종 시대와 그 정치에 대한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세종 이전의 대명관계

2. 세종대의 대명관계와 사대주의

가. 세종의 즉위

나. 세종의 사대론

다. 명과의 구체적인 관계



Ⅲ. 결론

본문내용

요구했고, 조선은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34명의 처녀를 뽑아 보냈고, 이후 추가로 더 보냈다고 한다. 이때 뽑힌 여자들 중에는 조정 관리의 딸도 있었다고 한다. 명으로 보내진 처녀들은 간혹 황제나 황족들의 총애를 입어 후궁으로서 입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고 고통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자를 진상하라는 요구 역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1419년 영락제는 사신 황엄을 보내 화자 40명을 요구했거니와 조선은 원민생을 보내 20명의 화자를 진상했다고 한다. 이어 1423년에도 화자 30인을 선발했고, 1428년에도 명에서 환관을 요구하였으므로 각 도에 환관을 보내 나이 어린 화자를 모집했다고 한다.
처녀와 화자의 진상은 매우 조선의 입장에서 매우 부당하고 억울한 것이었다. 세종대까지 이어지던 이 처녀와 화자의 진상은 세종의 노력으로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대명관계에서 조선은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환관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명사를 접대하고, 처녀와 화자를 진상했으며, 그 밖에도 해동청을 비롯한 많은 물자를 진헌하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 유지되던 대명관계를 통해 세종 시대 조선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원만한 명과의 관계를 통해서 명의 군사적 침략을 막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을 것이고, 다음은 명의 발달된 문물을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세종은 문화 선진국 명을 통해 발달된 문물과 서적 등을 수용하여 조선의 유교적인 정치체제를 완성하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에서 명에서 서책을 구하기 위해 세종이 기울인 정성과 노력은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고 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1435년 진하사 심도원 등이 북경에서 『자치통감』을 구해다 바치자 그에게 안구마 1필을 내려 시상했고, 1440년 요동에서 『영충록』을 팔겠다는 중국인이 나타나자 마포 15필을 주어 급히 그것을 구입해 오도록 조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 시대 대명관계에서 조선이 얻고자 했던 것은 도서만이 아니었다. 명은 조선이 제대로 자급할 수 없는 3가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크게 서적, 약제, 악기였다. 뿐만 아니라 국방상 절실히 필요한 염초와 조선 기술에 대한 수요도 매우 컸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소 1만 마리 매매 요구 사건에서 소 1만 마리를 보내라는 명의 요구를 버겁게 여기면서도 수용하기로 한 것은 조선 기술과 같은 명의 기예를 요청하려는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세종대의 조선은 명으로부터 다양한 분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명의 버거운 요구에도 수용해서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Ⅲ. 결론
세종시대 조선과 명 사이에는 그야말로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조선과 명사이의 갈등의 요인이나 문제점들은 태종대에 대부분 해결되었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세종은 명에 대한 사신의 파견이나 공물 진헌, 명사에 대한 접대 과정에서 갖은 정성과 예의를 다했다. 이는 명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세종이 명에 대한 헌신적인 사대를 통해 황제에 대한 성의를 다함으로써 신료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다하도록 요구하는 정당성 획득의 목적도 있었다.
명사를 대접하고, 진헌물을 바치면서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세종 시대 조선은 그를 통해 명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그 바탕에서 명의 발달된 문물과 기예를 수용하는데 열심이었다. 조선은 서적, 약재, 악기로 상징되는 명의 선진 문물 뿐 아니라 화약, 조선 기술, 산법 등 명의 선진 기예를 익히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세종 시대 조선은 많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대가를 치르면서도 명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 명의 문물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대명관계의 안정과 명 문물의 수용을 통해 훗날 ‘조선의 황금기’라고 평가받았던 세종 시대의 치세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 시대의 외교정책, 그 중에서도 대명관계에 있어서의 사대정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생각해 보면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한글창제로 대표되고 과학기술 발전, 민생안정 등과 같은 세종대왕의 업적에 사대적인 대명관계를 통한 안정과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또 다른 업적이 더 추가되었다.
♠ 참고문헌
☞ 세종문화사대계3 -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역사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세종의 수성 리더십 / 박현모 / 삼성경제연구
  • 가격1,4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6.01.14
  • 저작시기2016.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920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