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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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수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수의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정세

(2) 전쟁의 원인

(3) 전쟁의 과정

1) 전쟁의 시발점

2) 수․고구려의 전쟁준비

3) 요하 도하 및 요동성 전투

4) 평양 부근 전투(수군)

5) 살수대첩

6) 수의 재침과 양현감의 반란

7) 614년, 마지막 침공

(4) 전쟁의 영향



Ⅲ. 맺음말


Ⅳ.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였으나 그간의 승전과 주위 사람들의 의견에 못 이겨 마침내 살수를 건너 7월 초순 평양 북쪽 30리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온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니, 평양성이 험고하고 군사들이 피로하여 결국 돌아가게 되었다. 행군하고 있을 때, 고구려 군대가 사방에서 공격하여 싸우면서 나아가다 살수에 이르러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뒤쪽에서 그 후군을 치고 강의 둑을 터뜨림으로써 모든 군대가 궤멸하게 되었다. 처음 30만 5천명이었던 9군 중 고작 2천7백 명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한다. 또한 군량과 군사 기계가 억 만에 달하였으나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수군은 8월경 본국으로 철수한다. 을지문덕 장군의 승리는 개인적인 역량에 의한 것이었으나, 국가적인 군사 체제가 작동하여 평양까지 유인하여 전멸에 이르게 하였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수의 재침과 양현감의 반란
수 양제는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 실패의 다음해인 613년 정월에 조서를 내려 전국의 병력을 탁군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이 직접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4월, 수 양제는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5월 초순경에는 요동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새로운 공성전술을 동원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으나 20여 일이 지나도 함락할 수 없었으며, 수군과 고구려군 모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 수나라 국내에서 예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켜 10만의 병력을 이끄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함에 따라 정세가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결국 수나라는 6월 하순에 이르러 필수적인 개인장비와 최소한의 식량만을 가지고 밤에 몰래 본국으로 철수하니, 수나라가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여 제작한 제반 장비와 무기 및 군수품은 고스란히 고구려의 것이 되었다. 수나라 군대가 많아 섣불리 추격하지 못하다 요하에 이르러 후군 수만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7) 614년, 마지막 침공
수 양제는 국내에 돌아와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고, 연이어 발생한 반란들을 제압한 후 이듬해 614년 2월에 다시 고구려 공격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미 나라가 어지러워 많은 병사들이 기한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아 원정군의 구성마저 어려운 상황을 맞는다. 그 해 7월 중순에야 요하 서쪽의 회원진에 겨우 원정군이 도달하게 되고, 수나라 수군은 고구려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이번 전쟁을 수나라가 오래 끌 수 없을뿐더러 고구려도 맞서 싸워야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망명해온 곡사정을 수나라에 돌려주는 한편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8월 회원진에서 군사를 되돌렸다. 10월 영양왕을 수나라 조정에 들어오도록 했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고, 수 양제는 군비를 엄하게 하여 다시 공격할 것임을 명하였으니 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수의 4차에 걸친 침입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전쟁을 종결지었다.
(4) 전쟁의 영향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4차례의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 수나라는 결국 그 짧은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운하건설 및 만리장성의 보수 등 대대적인 공사, 무리한 원정에 따른 인구 감소 및 장비물자 등의 소모는 당시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동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와 북주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나라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한편, 고구려 역시 16년에 걸친 장기전으로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수의 대대적 침공을 4차례나 겪으면서 인적물적 손실이 막대하여 결국 신라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고 만다. 고구려는 수의 뒤를 이어 성립된 당의 침입에 대비해 16년에 걸쳐 부여성에서부터 서남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한다. 이는 당의 침입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해석할 수 있으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간 천명해오던 팽창주의가 국력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중국의 왕조교체는 물론, 고구려의 국력도 쇠하여 남쪽의 신라가 성장하게 되는 시간적공간적 여유를 제공하여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Ⅲ. 맺음말
5세기경 이루어진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단순히 두 국가간의 충돌이 아닌, 서로 다른 문명끼리의 충돌이었다. 수의 입장에서도 경제적, 문화적인 문제 등 고구려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으며, 결국은 국력을 기울인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국가가 멸망하기에 이른다.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하며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는 역사상 예가 없는 대대적인 침공에도 우리 민족의 영토와 문화를 지켜내었다. 이러한 고구려인의 호국정신은 그 당시에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우리 민족의 귀감이 되어 수많은 외침에도 굴하지 않고 한반도에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그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킨 고구려. 비록 지금은 우리의 영토가 아니지만 동북아시아에서 호령하던 그 기상만은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활기찬 기상과 웅장한 위엄,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성립된 문화는 고구려가 대륙국가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수와의 전쟁 이후 국력이 소진되어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하게 되고 우리 민족의 활동이 한반도에 국한되었던 점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하지만 그 높은 정신은 계속 계승되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았으며, 고려라 나라의 이름을 정했던 점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동북공정’으로 문제가 많은 요즈음, 하루빨리 중국의 역사왜곡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올바른 해석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Ⅳ. 참고문헌
-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김용만, 1998
-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9
-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송영만, 2000
- 고구려의 대외정복 연구, 백산자료원, 이인철, 2000
- 동양의 역사와 문화, 청송출판사, 김동정, 2002 (2002년도 수업 교재)
-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이종욱,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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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30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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