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金東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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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동인(金東仁)에 대하여...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동인의 생애

2. 김동인과 관련된 일화들
1) 횡보 염상섭과 김동인
2) 김동인의 성격과 관련된 일화
3) 김동인의 삶과 관련된 일화

3. 작품 연보

4. 작가 연보
1) 문학세계로 내딛은 첫 발걸음 (1900~1917년)
2) 방탕과 오만과 패기로 가득한 문학활동 시절 (1918~1929년)
3) 생활을 위한 궁여지책으로서의 문학활동 (1930~1951년)

5. 김동인의 작품
1) 초기작 <약한 자의 슬픔>
2) <감자>
3) <명문>
4) <김연실전>
5) <붉은 산>
6) <배따라기>
7) <광화사>

6. 김동인의 사상
1) 예술지상주의
2) 자연주의
3) 탐미주의(유미주의)
4) 인형조종술*
5) 민족주의

7. 김동인 문학의 특징
1) 근대소설적인 요소
2)구어체의 확립문제
 2-1) 이광수가 썼던 '더라'대신 '-다'로만 통일했다.
2-2) 풀이말의 종결어미를 모두 과거형으로 써서 구어체를 완성했다.

8. 김동인 고찰

본문내용

그렇게 쓰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평소 언어생활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김동인은 어째서 현재형을 모두 배척하였나? 어째서 과거형으로만 통일해 사용한 것을 '구어체의 완성'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인가?
김동인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心讀, 音讀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껍질을 깨뜨린다 하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었다.”이것이 과연 진정 그가 껍질을 깨어 구어체를 만들기 위해 한 것인지, 혹은 자기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취한 행동인지는 오직 그만 알 일이겠으나, 혼자만 스스로 만족하는 글체가 과연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또 문학사적으로 획기적 사건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그 역시 과거시제만으로 서술하는 것의 한계를 느꼈는지, 혹은 작은 실수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발명했다는 그 문체를 쓴 작품으로 '감자'의 예를 들었는데, 이 감자에서도 현재형의 문장 종결어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팔에 늘어진다.'라는 문장이 그 예이다. 물론 감자 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현재형을 발견할 수 있다.
2-3) '그'와 '그녀'"春圓의 作에 ‘그’라고 한 곳이 두세 군데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사용치 못하였다. 春圓은 지금의 ‘그’라고 쓸 곳을 대개 이름(고유 명사)으로 하여 버렸다. He 와 She를 모두 ‘그’라고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버린 때의 용기는 지금 생각하여도 장쾌하였다."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 김동인은 자신이 '그'와 '그녀'를 확립시킨 장본인이며 그에 대해 스스로 높은 만족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와 '그녀'는 김동인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일본어의 '카레' '카노죠'를 그대로 직역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로 통일함으로써 오히려 김동인 스스로가 확립했다 자부하는 구어체와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통, 우리의 언어생활을 돌이켜보면 '그 사람' ' 그 남자' '그 아이' '그 자식'이런 식으로 관형사로 쓰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3인칭 대명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8. 김동인 고찰
일반적으로 김동인에 대한 순문학자 혹은 예술 지상주의자로의 신비화는 주로 이 땅의 최초의 순문학잡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 가산(家産)까지 소비하여 <창조>를 발간하고, 이광수에 맞서 '순문학 건설'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여기에다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손꼽히는 소설 감자, 광염소나타 등의 작품세계를 곁들여 순문학자 혹은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사실 특정 시기 김동인의 문학적 삶에 해당할 뿐, 1930년대 후반기의 문학적 삶은 오히려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형국이다.
김동인이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산으로 <창조>를 발간외에 엄청나게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생활은 차츰 빈곤을 향해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다. 이러한 갑작스런 생활상의 변화는 우울증 등 신경증의 병마를 가져다주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 최면제 등을 과다복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마약까지 손대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에는 약물중독에 의한 병마에 마지막까지 시달려야만 했다. 거기다가 아내 김혜인마저 가출하였다. 경제적 파산과 가장파탄의 이중적 고통이 그의 삶을 뿌리 채 파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다시 재혼한 김동인은 다음해부터 서울로 이사하여 그로서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것은 원고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고료를 달라고 주요한,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통속화시킨다고 그토록 경멸했던 신문 연재소설 창작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의 문학적 훼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른바 김동인 문학의 제2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통속역사소설, 야담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산출된 것이다. 경제적 궁핍으로 원고료 수입을 위해 통속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근대문학 초창기에 그야말로 '문학을 위한 문학'을 소리높여 주창하였던 순백한 예술지상주의자가 통속작가로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자진해서 일제에 협력하고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김동인의 친일행위는 자포자기의 삶이 가져다 준 삶의 파탄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탄은 그의 죽음까지 멍들게 하고 만다. 한국전쟁 와중에 정확히 언제이지도 모르게 그는 홀로 고독히 죽어갔다.
우리 근대문단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손꼽혔고 <창조>를 직접 발간함으로써 근대문학의 화려한 개척자로 칭송받았으며, 그런 그답게 근대문인 중 가장 호사스럽고 안하무인격인 행동으로 위세를 떨쳤던 김동인이었지만 호사와 방탕이 가져다 준 경제적·정신적 파탄은 그를 가장 통속적인 야담소설가로 밀어뜨리고 끝내 친일문학가라는 늪으로까지 그를 끌고 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파탄이 가져다 준 희극적인 비극의 운명에 빠뜨렸다.
김동인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의 문학의 특성, 그 동안의 김동인 연구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김동인의 문학사적 공헌은 서구적 자연주의 문학의 확립, 단편 소설의 최초의 기반 세움과 단편 소설이 지니는 속성의 하나인 유머, 위트, 역설을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하고 문장을 혁신하였다. 또한 <창조>, <영대> 발간으로 문학 활동의 가교를 마련하고 탐미적 경향의 작품을 추구하여 이광수의 계몽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문학의 예술성과 순수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근대 문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런 김동인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순수성을 잃고 통속성에 빠지며 친일을 하게 된다. 이런 그의 모습으로 인해 오늘날 김동인의 평가는 양극화 되고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한 작품은 작가의 삶과 행동, 그리고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와 작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그 둘을 연계시켜 생각해 보아야 진정한 분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김동인의 삶과 행로, 그리고 작품을 우리의 시각으로 분석하되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되도록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작가론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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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1.17
  • 저작시기2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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