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 창건속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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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리 말

2. 사 요
3. 진성여왕
4. 궁 예
5. 견 훤
6. 왕 건
7. 사요에 대한 숙고

8. 결 론

본문내용

라를 옹호하기 위한 김부식의 편견과 왜곡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일부의 역사가들과 정부 그리고 대중 매체들은 계속해서 국가적인 목적 때문에 그러한 편견들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어떤 외국 학자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아마도 모든 가장 신랄한 아이러니는 바로 한국을 분명하고 통일된 문화적 실체로서 신라로까지 거술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민족주의자나 또는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기 위해서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은 증거를 사용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 Unruh 앞의 책, p.59.
분명히 통일된 한국은 왕건 이후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대중 매체들은 신라나 고구려나 백제에 관한 김부식의 건국 연대를 마치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전통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사실인양 그대로 줄곧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왕건을, 또 그보다는 좀 덜 하지만 궁예나 진훤 역시 定型化된 양식으로 이들을 계속해서 묘사하는 것은 영웅에 대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욕구가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많은 한국 가정들의 서가를 장식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한국의 그림 역사책 한 권은 해방자로서의 위대한 장군 왕건의 도착을 환호하는 어느 촌락 농민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마치 어린시절의 영웅인 로빈 훗이 생각나는데, 악인들이 두려워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로빈 훗, 그는 또한 감동적이고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이기는 했지만 또한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의 세 명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한 왕조의 몰락과 다른 왕조의 창건에 포함된 여러 가지 사회.정치.경제적인 요인들을 왜소화시키면서 실제보다 더 과장되고 도식화된 인물들로 사료속에 비치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李丙燾나 李基白 또는 金哲埈과 邊太燮 그리고 여타 다른 교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요소들의 일부를 조명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사료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신라계승주의자로 된 왕건에 관한 사료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현재의 기본적인 해석 역시 사료들 속에 나타난 '선인.악인.추인'이라고 하는 너무나 자구 해석적인 典型(도식화된 인물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왕건 자신의 태도라기보다는 역사 편찬자들의 태도를 반영해 주고 있는 통치에 대한 '진보적'인 유교적 접근 방법을 왕건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金哲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 신분이 낮은 弓裔勢力으로서는 당연한 주장이라고 하겠으나, 그 세력의 基本構成이 群盜出身이었다는 점은 지방지배에 있어서나 백성에 대한 收取方法에 있어서 古代的인 收取方法에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와 반대로 오랫동안 新羅 中央政府의 과도한 收取에 반항하면서 성장한 豪族勢力을 기반으로 한 王建은, 卽位하면서 곧 '取民有度'를 표방하는 政治意識으로써 古代的 收取에 반대하는 中世的 性格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면에서 우선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弓裔나, 무력적으로 지방세력을 脅從시키는데 그친 甄萱과는 다른 政治的 體質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古代的인 族制原理를 폐기한 弓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古代的인 收取制度의 止揚까지도 내세우면서 地方豪族의 통합에 힘쓰고 儒敎政治를 표방하는 詔書라든지 外交文書 등은 崔致遠 계통이라고 생각되는 崔彦 등이 제작하였을 것이나, 그러한 정치를 내세우는 基調는 王建의 政治體質에서, 다시 말하면 地方豪族勢力의 체질에 기반을 두면서 骨品制度 아닌 새로운 支配體制原理를 찾는 基調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金哲埈, <羅末麗初의 社會轉換과 中世知性>, ≪社會科學新聞≫ 6권, 1976-7, pp. 41∼42 참조. 이 기사는 김교수의 <羅末麗初의 社會轉換과 中世知性>의 英譯版이며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처음 게재되었으며, 그의 몇 개 저서에 재수록되었다.
이런 식의 설명들은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지만, 왕건의 훈요십조와 그의 것으로 알려진 여타 문서들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왕건을 근본적으로 '유교적' 통치자로서 연출되어진 사료들을 혹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본적인 질문(아마도 결코 만족스럽게 답변되어질 수 없는)은 여전히 남아 있다.
) 이 훈요십조는 조작의 냄새가 풍긴다. 일본 학자인 今西龍은 예전에 이 명령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학자들은 열렬하게 그것의 역사성을 옹호하고 있으나 그 훈요십조의 진실성에 대한 어떤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李丙燾의 ≪高麗時代硏究≫ pp. 23∼48에 今西龍에 대한 비판과 이 명령들의 내용 연구가 기술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만약 기본이 되는 사료들이 어떤 부분에서 편파적이고 왜곡되어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 정확하겠는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어느 정도인가? 요컨대 우리가 실제로 수용할 수 있는 것과 편찬자들의 편견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경계를 어디로 잡을 것인가?
사실 우리의 소견을 과감하게 바꾸기에는 신뢰할만한 다른 사료가 없으며, 또 다른 사료를 우리가 발견할 것 같지도 않다. 이들 사료들을 무시하자거나 역할을 반대로하여 왕건을 반역한 찬탈자로, 궁예나 진훤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자는 것이 나의 제안은 아니다. 그러나 신라 지배에 대해 순종하지 않았던 그들의 배경, 그들의 정책 능력과 理想이 왕건 이후의 사료들이 보여주는 것 보다는 상당히 더 유사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다면 10세기의 한국은 진훤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옛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부터 한반도를 통치하는 새 왕조는 정복을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백제계승자'로서의 역사를 선전했을 왕조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다.
본 小考를 작성한 나의 목적은 오늘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료를 통해 고려 왕조의 창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몇 가지 난점들을 단순히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왕건과 진훤 그리고 궁예의 성품을 '선인.악인 그리고 추인'이라고 내가 택한 제목은, 적어도 나에겐 사료들 속에 나타난 이야기의 흐름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영화 대본과 같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키워드

고려,   창건,   인물
  • 가격2,3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2.12.12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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