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게르만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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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대별 게르만족
1. 카이사르(Caesar) 시대
2. 타키투스(Tacitus) 시대
3. 게르만족의 대이동(Volkerwanderung) 시대

게르만왕국
1. 북아프리카의 반달족(Vandal)
2. 에스파냐의 서고트족(Visigoth)
3. 이탈리아의 동고트족(Ostrogoth)
4. 남프랑스의 부르군트족(Brugundians)
5. 북프랑스의 프랑크족(Frank)
6. 영국의 앵글로색슨족(Anglo-Saxon)
7.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르만족(Norman)

사회체제
1. 정치
2. 전쟁
3. 문화

본문내용

리크 같은 유명한 족장들은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살았거나 부족연합체를 이루지 않고 국경수비조약(foedus)으로 보호되고 있는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들은 타키투스가 묘사한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권한을 거의 갖지 못했던 것 같다. 게르만족은 신분제 사회였다. 게르만 공동체에는 3가지 신분이 있었는데 자유인, 반자유인, 노예였다. 노예는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반자유인은 개인적으로는 자유스러웠지만 자유인의 기본재산이나 가정으로 재산으로 묶여 있었다. 자유인들은 귀족층 상류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종교적, 문화적, 세계관은 이 종족이 기독교화됨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다. 게르만적인 문화는 이단, 세속시되어 원시적이라고치부되거나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게르만적인 요소를 잊어 버리게 유도를 했다. 한 때 사람들은 게르만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기독교가 확산됨에 따라서 문화전반에 침투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지배하게 되었다.
2. 전쟁
'Thing'은 최고의 권력기구로 지방 공동체 자유인의 모임이었다. 모든 자유인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지워졌다. 작센같은 몇 개의 종족은 완전히 민주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종족은 왕이 다스렸다. 민주정치를 하던 부족들은 전쟁을 수행 할 때 장군(Herzog)을 한 명 내세워 그에게 부족에서 모집한 모든 병역의무자들을 맡겼다. 자유민 사회에는 독특한 종사(從事)제도가 존재하여,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시종하고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부양을 받고, 무기를 지급받아 전쟁시에 주인을 위하여 싸웠다. 이 종사제도가 봉건시대의 봉건가신제(封建家臣制)의 시초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석기시대의 무기는 활과 도끼가 주였으나, 켈트인과의 접촉에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철제투창을 사용하게 되었고, 1세기 무렵에는 철제검도 사용하였다. 로마 제국 초기에 게르만족의 무기는 공격용이든 방어용이든 금속을 별로 쓰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게르만족의 주무기는 긴 창(Lanze)과 도끼(Axt)와 칼(Schwett)이었다. 그러나 칼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투구와 가슴받이도 거의 없었다. 가벼운 나무나 고리버들로 만든 방패가 유일한 방어용 무기였는데, 방패 가장자리에 쇠테를 두르거나 가죽으로 보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르만족이 중무장한 로마군을 향하여 그토록 신속하고 맹렬한 돌진을 감행한 것은 이처럼 적절한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방패와 공격용 창뿐인 게르만족이 장기적인 백병전(白兵戰)에 말려들어 갑옷을 입은 로마군의 칼과 맞설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6세기까지도 게르만족 가운데는 장비를 갖춘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중무장한 기마 궁수대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병력도 없었다. 게르만족의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와 로마제국과의 연계성은 매우 높다. 로마제국 당시 게르만족은 대표적인 야만족으로 분류되었다. 야만(野蠻)을 Barbarism으로 야만인을 Barbarian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바바리아(Bavbaria, 독일어로는 바이에른 Bayern)를 상기하면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은 무자비함과 흉폭함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표현되었다. 카이사르(시저)가 지배했을 당시 로마군과의 전투장면을 본다면 도끼를 휘두르며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다가 로마군의 체계적인 방어와 공격에 패배하며 휘퇴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이 보기에 게르만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발탁될 만큼 힘과 전투력을 가졌으며 그로인하여 로마군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게르만 용병에 의하여 로마제국이 붕괴되고마는 결과 까지 이르게 된다.
3. 문화
카이사르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목축민이었고 양과 소를 사육하여 젖·치즈·고기 등의 식량 대부분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사도 지었는데, 주요농작물은 곡식과 근채작물 및 채소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인을 통하여 포도와 과일재배기술을 습득했다. 그전 까지는 사과재배가 전부였다. 게르만족의 소와 말은 로마인의 기준으로 보면 품질이 좋지 않았다. 밀로 빵을 만들었고 보리로 맥주도 만들었으며, 문자는 없었지만 단순한 음악 ·무용을 즐겼고, 영웅의 무용을 칭송하는 시를 좋아하였다. 게르마니아(고대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의 거주지에 붙인 이름)에서는 카이사르 시대보다 약 4세기 전에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카이사르 시대에도 여전히 금속은 가정용품을 만드는 데 쓰기에는 사치스러운 재료였고 가정용품은 대부분 나무·가죽·진흙으로 만들었다. 게르만족이 사용한 물건 가운데 큰 금속제품은 아직도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무기는 철기였다. 도기는 대부분 손으로 만들었고, 물레를 돌려서 만든 항아리도 비교적 드물었다. 초기에 게르마니아에서 교역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예무역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많은 노예들이 로마인에게 팔려갔다. 물레를 이용하는 도공들(극히 드물었음)과 대장장이, 광부들은 분명 그들이 만들거나 캐낸 물건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게르마니아의 보통 마을에서는 집에서 쓸 물건을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켈트족의 상품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취급하는 외국상인들이 게르마니아에서 활동하면서 포도주와 청동기 같은 상품을 부유한 군인들에게 공급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는 로마 제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이 크게 늘어나 게르만족의 지도자들은 전에는 손에 넣지 못했던 모든 부류의 상품(유리그릇, 붉은 식탁, 로마의 무기, 브로치, 작은 조상, 다양한 장식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로마 제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높은 지위를 상징했으나, 어떻게 그 값을 지불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르만족의 세계관과 생활상은 북게르만족의 두 편의 전설집인 에다(Edda)에서 전해진다. 신앙은 자연숭배였고 신들을 인격화하여 나타내었다. 당시의 게르만인은 퇴폐적인 로마인과는 대조적으로 신체의 단련과 순결, 엄격한 도의심, 충성과 무용, 소박한 자연성, 넘치는 정열, 생생한 공동체의식 등이 매우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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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5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2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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