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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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공주시의 위치
1) 수리적 위치
2) 지리적 위치
3)관계적 위치
4)교통적 위치

2. 공주시의 면적

3. 공주시의 행정구역
(1) 공주군 시대
(2) 공주시. 군 분리 시대
(3) 공주시 통합 시대

4.개황공주시의 인구
(1) 공주시의 인구 개황
(2) 공주시의 인구분포와 인구밀도
(3) 공주시의 인구이동

5. 유적으로 본 공주시의 역사

본문내용

혼인은 962쌍에서 1,910쌍이 하였으며, 이혼은 281쌍에서 322쌍이 이혼하였다. 최근, 가족계획과 자녀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적은 자녀수를 낳기 때문에, 출생자수에는 큰변화가 없으며, 의료기술의 발달로 사망지수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혼인은 1995년에 1,910쌍이던 것이 1999년에는 962쌍으로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있다. 이혼은 최근 사회발전과 핵가족화 등으로 인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표 4> 공주시의 호적에 의한 인구동태(1995~1999년)
구 분
계 (명)
출 생 (명)
사 망 (명)
혼 인 (쌍)
이 혼 (쌍)
1995년
5,265
1,680
1,370
1,910
305
1996년
5,137
1,669
1,330
1,857
281
1997년
4,475
1,606
1,303
1,244
322
1998년
4,267
1,469
1,414
1,082
299
1999년
4,092
1,495
1,307
962
321
5. 유적으로 본 공주시의 역사
1)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
이곳 석장리구성기 유적은 선사시대 전기-중기-후기의 다양한 문화층이 형성되어있었으며
집터, 불땐자리, 사람의 털과 짐승의 털, 불에 탄 곡식 낟알등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긁개,
찌르개, 자르개, 주먹도끼, 주먹대패등 타제석기 3,000여점이 발굴-출토되어 선사문화를 연구
의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배밑바닥 모양의 석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약3만
년전~1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아시아-베링해-알레스카-북미대륙에까지 널리 분포
하고 있어 동북아시아에서 북미대륙으로 사람들이 이주한 과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공주 석장리 유물을 단순보존, 전시하는 차원을 넘어
석장리 구석기 문화를 이룩했던 구석기인들의 생활문화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문화를 이해
하고 체험토록 하기 위하여 지상1층 1,475㎡의 면적을 820㎡의 유물전시관을 건립, 선사시대
의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2)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군집된 곳으로 공주시에서 서북방으로 약 1㎢지점인 금성동 웅진동에 인접한 송산리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백제 25대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7기의 고분이 있다.
현재 외형으로 고분은 벽돌로 만들어진 전축분인 무령왕릉과 6호분이 있으며, 이외로는 일제때 발굴된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횡혈식 석실분인 1~5호분이 있다. 고분의 배열은 석실분인 5호분과 전축분인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하나의 그룹을 이루고
북쪽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1~4호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수십기의 고분이 더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무덤중 유일한 전축분이다. 현재까지 석춘분은 많이 발견발굴되었으나 전축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양식의 무덤이 군집된 곳이라 할 수 있다.
3) 공산성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으로 토석혼축 산성으로 둘레 2,660m 면적 21만m이며 남으로 시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 형태를 띄고 있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 인조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도성이기는 하나 백제시대 뿐만아니라 역사의 변천속에서 시대별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각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성의 명칭은 백제시대 축조 당시는 웅진성이라 하였으나, 고려시대이후에는 공주산성-공산성, 조선시대 인조인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의 구조는 석축이 약 1,925m, 토축이 약 753m, 동문지 밖의 토성 467m까지 포함하여 저네가 2,660m이며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높이 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 보수되어 있고,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져 있다.
성내에는 진남루-공북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성사적비-영은사-연지-임류각-군창지-동문-서문등의 유적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후에도 의자왕(백제 마지막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창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대왕이 피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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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2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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