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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였던 시대였다. 따라서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중국이나 다른 외세에 맞섰던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런 신채호가 황제의 칭호를 쓰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던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영웅으로 파악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더구나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 이후 우리 역사는 몽고의 간섭을 겪었고, 조선 역시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통해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즉 중국에 대한 도전이나 대외적인 진출은 철저히 억제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했고, 결국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신채호가 황제의 칭호를 쓰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던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영웅으로 파악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더구나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 이후 우리 역사는 몽고의 간섭을 겪었고, 조선 역시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통해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즉 중국에 대한 도전이나 대외적인 진출은 철저히 억제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했고, 결국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